"델핀은 숙소에서 연락이 왔다는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뭔가요 묻는다. 직원은 엽서를 한 장 건네준다. 델핀은 스페인에서 온 엽서를 들고 방으로 올라간다.

   -델핀, 휴가는 어떠니?

   나에게는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어. 괴로운 일들도 있었지만 그게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어. 하지만 마음이 역시나 혼란스러워. 기다리던 것은 찾았니? 아직 많은 것이 남아 있어.


   해미는 커다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뭔가 씩씩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고 나와 미래는 해미야 힘내 왠지 웃기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지하철역까지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 마신 컵들을 정리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모두가 앉았던 자리에는 둥글게 들어간 얇게 파인 공간이 있었다. 거기엔 어떤 작은 것들이 누워 있는 거지? 그리고 우리의 다리 사이로는 어떤 것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뛰어다니는 거지? 혹은 의자 뒤에 숨어 있는 것들은?

   나와 미래는 극장을 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드물게 날씨가 좋은 날이었고 그래서인지 선명하게 노을이 보였다. 뿌옇지 않고 선명한 청색의 하늘과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붉은색이 만나고 있었다. 여름은 삼십 미터 앞에 있지 않고 나란히 걸어가고 있어. 나란히는 아닌가, 세 걸음 정도의 간격으로 걸어가고 있어.

   "영화 어땠어? 좋았어?"

   "음. 좋았지. 뭔가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우리는 반걸음쯤 사이를 두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우리와 여름은 반걸음보다는 약간 더 멀지만 이름을 가볍게 부를 수 있는 거리를 두고 걷고 있다. 나도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느낌 여름보다 멀리서 무언가 반갑게 인사할 것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역에 도착해 미래는 먼저 지하철을 타러 가고 나는 좀더 걷겠다고 하고 손을 흔들었다. 남아있는 것들과 함께 걸으며." (박솔뫼, <차가운 여름의 길>, <<사랑하는 개>>)




//  나는 그동안 후장사실주의자들이 왜 서로의 책에 서로 해설을 써주는가 왜 이들은 자신들의 폐쇄성을 이런 식으로 전시하는가 좀 궁금할 법도 하지 않아? 저자로서 동시에 독자로서 평론가란 작자들이 어떻게 이걸 해설하려고 들는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책을 읽고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권말에 금정연은 교정지를 받아든 자신이 소설을 읽은 세 가지 방식에 대해 기술하는데 이는 각각 1)쳐다보기 2)읽기(메모) 3)읽기(침대에 누워서)로, 각각의 내용을 요약하면 1) 개+박솔뫼=사랑스러운 소설. (Q.E.D.) 2) "비평으로 나아가지 않고 비평 이전에 멈추는 것을 선호한다는 바르트의 말" 3) 사랑하는 개를 사랑하며 (박솔뫼의 소설을) 읽는 것이다. 숫자가 3이라니 (바르트를 인용하는 금정연의 의도에서) 뭔가 냄새가 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종류의 구린내...는 금정연의 모든 글에서 느껴지는 것이고 나는 반쯤 포기했고 나머지 반에는 정이 들 것만 같다. 어쨌든 그의 문제의식만큼은 잘 알겠다 그가 힘겹게 덕지덕지 쓴 메모들이 하나의 글이 되지 않은 이유란, 그가 "읽기 전부터 <<사랑하는 개>>가 사랑스러운 소설이라는 것을"(144)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것은 <<문학의 기쁨>>에서 정지돈과 금정연이 김태용의 <<벌거숭이들>>을 두고 나눈 일련의 대화다.


   "김태용의 소설이 갖는 일반적인 오해나 편견이 있다.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난해/난삽한 말장난, 문학이 아닌 망상이라는 거다. 조효원의 해설은 이에 대해 반박하며 김태용의 소설을 그렇게 읽는 자들을 기각한다. 그는 김태용의 "리듬-연상의 복잡계"가 "문학의 영토"를 떠난 "허무로 수렴될 것만 같은 절대적인 유언"이며 이는 "음악 이전 혹은 직전"의 "한계 영역"으로 돌입한다고 말한다(무슨 말인지.......)

   우리는 조효원의 이런 이야기들이 그가 기각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만 동일한 양상의 오해를 조장한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김태용의 소설은 서사를 해체한 난공불락의 성,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불가능의 영역으로 돌입하는, 블랙홀로 진입하는 인듀어런스호 같은 소설이라는 인식을 다시 한 번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했다.


(...)


   3부도 할까. 금정연 씨가 말했지만 우리는 이런 분석은 멈추기로 했다. 우리가 이렇게 김태용의 작품을 분석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소설에서 연상과 말장난을 거둬내면 의도와 계산이 곳곳에 숨어 있고 이는 무의미한 말장난, 툭 튀어나오는 연상과 화음을 이루며 손쉽게 기각되었던 재미나 의미를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태용의 소설이 흔한 편견이나 수사처럼 대단히 난해하거나 심연스럽고 불가능한 무언가가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텍스트의 조각 속에서 드러나는 내용은 생각보다 평범하고 보편적이기까지 하지 않나. 그냥 한 번 읽고 두 번 읽으면 된다. 힝요오에 웃고 마라롱을 귀여워할 수도 있다. 불가능하지 않다. 가능하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불가능'은 같은 글에서 언급된 바 '불가능을 가장한 아카데미즘'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무슨 말인가? 이들의 판단에 김태용의 소설은 '가능한' 것인데 조효원의 해설은 그것을 '불가능의 영역'으로 밀어넣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그것이 작품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평론의 경직성 때문이라고 본다. 건축방식이 다른 작품, 일면으로 전체가 파악되지 않는 작품을 어떻게든 조감하기 위해서 위로만 위로만 올라가다 보면 숨이 탁 막히는 지점이 등장하는 것이다. 산소가 희박한 공간에서 뱉어지는 말들이 뭐냐면 바로 불가능한 말이다. 이때 평론의 작품에 대한 선의는 어떤 교조성으로서 발현하고 만다. 이것은... 전위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의 막장 같은 것이 아닌가. 땅 속 어디서까지 버틸 수 있나 스스로를 시험해보는 굴착 작업이 아닌가. 오해가 오해를 낳는 상황을 타파하려면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다분히 옳은,

   말이다만 그게 무엇인가... 박솔뫼의 소설을 세 번에 걸쳐 읽기? "박솔뫼의 소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혼란에 대처하는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들을, 그 나름의 길을 가는 이야기들을,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말들을 정확하게 받아들이기. 섣불리 정리하거나 넘겨짚거나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고 혼란을 (잠시만이라도) 혼란으로 두기. (박솔뫼의 모든 화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세계 속에서 주인공도 희생자도 관찰자나 방관자도 되지 않고 세계와 함께 있기."(140-141)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혼란을 혼란으로 두기, 라는 말이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정리해서 인과율과 개연성과 기승전결 속에 욱여넣지 않기. '길을 가다 사람들을 만나 기뻤고 빵을 주니 빵을 먹어서 좋았다'고 말하기. 그러나 길을 가다 만난 사람의 의미와 그들이 먹은 빵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들은 대문자 역사의 일부가 되어 (비로소) 죽게 되는 것이다. 금정연의 글은 그것을 피하고 있다. (김태용처럼) 세 번 말하는 대신 세 번 읽기를 실천하면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사랑, 운운하는 것으로 문장을 추동하고 글을 빠져나가는 것은 너무 기름지고 미끄러운 방식이라 어떤 지점에서는 도무지 입에도 대고 싶지 않아진다. 비위가 강한 것은 좋은 음식을 만들고 먹을 줄 아는 것과는 거의 별개의 문제인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좋을, 필요도 없다는 걸까? 좀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랑도 좋지만 연대를, 거기서 발하는 어떤 서늘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박솔뫼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음... 나는 한 번 완독하고 아연해져서 책장 깊숙히 모셔둔 머리부터 천천히로 돌아가 볼 생각이다.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