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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는 당신의 입술을 닮은 양배추를

공장장_ 2017. 6. 30. 23:57

한 달에 두 번 쓰는 게 일기냐. 김승일 이야기다. 물론 남의 일기장에 툴툴댈 계제는 아니다. 다행히 청년지원 뭐뭐가 되었다. 기다리느라 하루를 날려먹었다. 다른 거 다 떠나 생활비가 필요했던 차라 기뻤으나 아무리 빨라야 7월 말에 입금이게 생겼다. 이래서야 샌들이 물 건너가는군. 애매하게 퇴근해 교보 가서 한 시간 남짓 앉아있었고 현대문학 7월호 읽었다. 박상순이 역시 대단하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가? 시 코너에 있는 시들 전부보다 훨씬 나았다. 흔히 시인들이 마흔 이후에 망하는 지점과 서른 이전의 치기어린 지점이 박상순에게서는 묘하게 합일되어 있다는 생각. 그도 자신의 나이에 의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리즈가 단행본으로 나오는 모양이던데. 이정도 수준이면 얼마든지 산다. 편혜영도 읽고 싶었는데 도무지 시간이 없더군. 내일 출근하지 않으면 읽으러 가겠지만.. 출근할 듯하다. 암묵적 데드라인이 월요일인 일이 있다. 모르는 척 해볼까? 주말이잖아. 그러길래 논문 좀 읽으라니까..


박상순을 한 편 옮긴다.


오늘 밤, 양배추를 먹어요 - 박상순


난, 가야겠어요. 해야겠어요. 멈추지

않을 거예요. 하루도 멈춘 적이 없어요.

돌소금은 버렸어요. 참치도 버렸어요. 난 이미

여기까지 왔어요. 이건 싫어요. 이건 무서워요.

이건 만질 수 없어요. 이건 아니어요. 난, 여기까지

왔어요. 올 수밖에 없어요. 괜찮아요. 두 시간쯤

걸었어요. 그렇지만 시계가 뭘 알겠어요.

여기까지 왔어요. 구름이, 하늘이, 강이,

돌고래가, 옥수수가 어찌 알겠어요.

달팽이가, 발가락이, 내 눈썹이, 벌써부터 다

보고 있었다고 해도, 어쩌겠어요. 하루도 멈춘 적이

없어요. 멈출 수가 없어요. 몰랐어요. 내가 이럴 줄

나도 몰랐어요. 그런데 벌써 여기까지 왔어요.

운동화도, 폭포도, 겨울옷도 이미, 다섯 개나

버렸어요. 그래서 당신을 봐야겠어요. 멈출 수가 없어요.

보이지 않아도 여기까지 왔어요. 당신 몰래

언덕을 내려갔어요. 언덕 위에 있었어요. 난 이미

파도가 되었다가, 바다가 되었다가, 뒤집어졌다가

모래알이 되었다가, 조약돌이 되었다가, 유람선이

되었다가, 비행기가 되었다가, 사실은 돌소금이

되었다가, 참치가, 옥수수가, 돌고래가 되었다가,

왔어요. 여기까지 왔어요. 당신 때문이어요. 사실은

나 때문이어요. 음. 괜찮아요. 조금밖엔 없었어요.

그래도 봐야겠어요. 당신을, 나를, 지붕 뒤로 튀었다가

땅속으로 꺼졌다가, 만질 수도, 멈출 수도,

숨쉴 수도 없지만. 돌고 있어요. 빙글빙글

돌아요. 멈출 수가 없어요. 오늘 밤,

달팽이는 당신의 입술을 닮은 양배추를 먹어요.

양배추를 밟아요. 양배추 같은 당신의 절망을

먹어버릴 거예요, 당신의 운명,

마지막으로 조금 남아 있는 당신의 시간도

다 먹어버릴 거예요. 나는 벌써

달팽이가 되어서, 당신의 언덕 위에 있어요. 이제

당신은 사라질 거예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있어요. 내가 여기 있어요.




6월에 쓴 것 정리했다. 네 편. 다 조금씩 마음에 안 든다. 좀 더 사랑해줘도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