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너만 남는데
"서바이벌 로터리의 부조리함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본다면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구명보트 위에서 네 사람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수평선에는 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식량이 떨어진 지 오래되어 다들 굶어 죽기 직전이다. 마침내 그들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을 잡아먹기로 한다. 한 명이 보를 내고 나머지는 가위를 낸다.
A(보를 낸 사람) : 사람을 잡아먹다니, 너희는 사람도 아니야.
B: 우리는 약속대로 하는 것뿐이야. 네가 이겼으면 너도 다른 사람을 잡아먹었을 거 아니야?
C: 우리 모두 죽는 것보다는 너 혼자 죽는 게 나아. 그러니까 이건 도덕적이야.
D: 사람이 아닌 건 우리가 아니라 너야. 너는 이제 우리의 식량이니까.
이렇게 해서 한 명이 먹히고 세 명이 남는다. 하지만 여전히 배는 보이지 않는다. 며칠 뒤 그들은 다시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 명을 잡아먹는다. 이제 두 사람이 남았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가위바위보를 한다.
C: 내가 졌군. 하지만 너는 나를 잡아먹을 수 없을걸.
D: 왜?
C: 내가 너보다 힘이 세니까.
D: 이건 불공정해. 진 사람이 잡아먹히기로 약속했잖아.
C: 내가 공정하게 행동하면 너는 나를 잡아먹을 거잖아.
D: 두 명이 죽는 것보다 한 명이 죽는 게 낫잖아? 우리를 위해서 네가 희생해야 해.
C: 내가 죽으면 너만 남는데, 우리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가상의 대화는 ‘모두가 죽는 것보다 한 사람만 죽는 게 낫다’는 공리주의적 계산법의 모순을 폭로한다(고 나는 믿는다). ‘낫다’는 것은 누구에게 그렇다는 뜻인가? 희생자는 희생이 결정된 순간부터 더 이상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말은 결국 ‘죽지 않기로 결정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죽지 않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 죽기로 결정된 사람에게 이 말은 완전히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사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공리주의적 계산법의 용도는 희생자를 설득시키는 것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양심을 위로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러한 계산법은 도덕적 발화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식인과 같이 – 도덕적 공동체의 존립 조건을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 한계적인 행위가 저질러진 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질서를 유지하려면 여전히 도덕이 필요하므로, 이러한 기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존자가 두 명으로 줄어들어서 살아남게 될 사람을 더 이상 “우리”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사태의 본질은 분명해진다. 도덕은 이미 거기에 없다. 먹고 먹히는 싸움이 있을 뿐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