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실수란 건 이 세상에 없다
"열세 살 때의 어느 날, 나는 저녁식사를 하러 부엌에 들어갔다가 우윳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리놀륨 바닥은 깨진 유리 조각과 우유로 엉망이 되었다. 아버지는 식탁에 앉아서 내가 그걸 치우는 걸 지켜보더니 말했다.
"적개심이구나."
아버지는 내가 그런 행동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한다고 말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연한 실수란 건 이 세상에 없다는 게 아버지의 설명이었다.
나중에 나는 프로이트주의 정신분석학자를 아버지로 두고 자란다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를 설명할 때마다 이 일화를 예로 들곤 했다. 나는 눈을 데루룩 굴리면서 말했다. "골치 아픈 일이야. 그날 나는 깨달았어. 아버지가 정신과 의사라는 건 골치 아픈 일이라고 말야." 하지만 사실 나도 우연한 실수라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생각의 자유를 존중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스무 살이 넘기까지는 두 분의 분석적 경향을 별다른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젠가 나더러 부모님한테서 혐오감을 느끼는 점,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미는 점을 있는 대로 말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열 살 정도 되던 나는 방 안에 서서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혐오감이라고? 부모님한테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 그 질문을 받고 내가 왜 그토록 불편함을 느꼈는지 이해했다. 내가 부모님한테서 뭔가 혐오감을 느낀다면, 부모님도 나한테서 혐오감을 느낀다는 뜻이 아니었겠는가?"
"AA모임에 나가면 가장 먼저 듣는,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의 가슴에 사무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격이 성장을 중지한다는 이야기다. 술은 우리가 성숙한 방식으로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을 박탈한다. 간편한 변신을 위해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면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진흙탕처럼 혼탁해지고 만다. 우리는 방향 감각도 잃고 발 딛고 선 땅에 대한 안정감도 잃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기본적 사항들 - 두려워 하는 것,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 - 도 알 수 없게 된다. 술에 젖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그것을 찾아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알코올은 우리에게 보호막을 둘러쳐서 자기 발견의 고통이 다가오는 것을 막아준다. 그 보호막은 극도의 안온감을 주지만 극도로 교활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허상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허상이면서도 진정한 실체처럼 간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비극은 그 보호막이 작용을 멈추면서 시작한다. 변신의 수학은 바뀐다. 이것은 불가피한 결말이다. (...) 고통이 커지면 어느 순간 옛 수학(불편+술=불편 없음)은 전처럼 들어맞지 않게 된다. '편안함'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소심함이나 두려운, 분노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좀더 깊고 근원적인 것을 찾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방정식은 더욱 강력하고 완전한 내용으로 바뀐다. '고통+술=자기망각'이라는."(캐롤라인 냅, <<드링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