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이미 발견되었고
"재발견은 가까이에서도 이루어졌다. 우리 곁의 지루한 대도시들이 하나둘 거대한 테마파크로 재탄생하여 사람들을 유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도시공간의 변화는 곧 거주자들의 삶의 양식의 변화를 의미했다. 여행지가 된 도시에서는 사람들도 여행자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여행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을 일련의 풍경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풍경이 된 세상은 아름답다. 거리에 가득 찬 쓰레기에서 고급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인까지, 여행자의 시선 속에서 세상은 공평하게 아름답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여행자는 세상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모든 것에서 한발자국 떨어진 채로 이미지로서의 세상을 경험한다. 이미지 너머의 세상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행자는 풍경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는 여행자의 바깥에 위치한다. 즉, 세계는 나와 단절되어 있다. 나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린 세계는 끝없이 펼쳐진 이미지들, 다시 말해 스펙터클로 환원된다. 이런 상황에서 여행자가 유일하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유랑적 감각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끝없이 펼쳐진 외부세계에 압도되어 자아가 소멸에 가깝도록 해체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이 경험만이 극단적으로 분리된 세계와 주체를 연결시키는 통로다. 잭 케루악은 소설 <<길 위에서>>에서 이런 여행자의 감수성을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 중요한 것은 여행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서 맛보게 되는 고양감이다.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누구보다 세계에서 소외된 자들이 갖게 되는 꿈. 이것에 한번 사로잡히게 되면 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여행을 많이, 오래 한 사람들은 쾌락에 관한 까다로운 전문가들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즐거움이 뭔지 안다. 그리고 그것을, 오직 그것을 믿으며 반복해서 떠난다. 그런 삶은 고립된 정점들 간의 끊어질 듯 앙상한 줄 긋기로 표현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휴가와 또 휴가 사이의 위태로운 줄 긋기로 이루어진 사민주의 사회 노동자의 삶의 패턴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우엘베끄는 데뷔작 <<투쟁 영역의 확장>>에서 그런 삶이 필연적으로 도착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을 인상 깊게 그려내었다.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이 끔찍한 권태는 한때는 정신 나간 예술가들이, 이어 젊은 혁명가들이 파괴를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마침내 자본의 흥미를 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권태의 최종 해결책을 갖게 되었다. 자본을 통해 관리되며, 소비를 통해 가능한, 한계 없는 쾌락. 감수성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었고, 여행 산업은 이 시장의 핵심에 위치한다. 여행자의 감수성은 끊임없이 찬미되고 번식하여 세계는 거대한 관광특구가 되었다. 문제는, 계속되는 불황 속에서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 삶의 토대까지 불확실해져가는 가운데 어느 순간 이런 식의 삶의 양식이 해결책이 아니라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자 찰나의 쾌락뿐 아니라 삶의 물질적 토대와 세계에 대한 사유까지 일회용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찰나를 살아간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가변적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호기심과 모호한 희망 속에서 삶이 일련의 놀라운 순간들로 쪼개지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신들이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된 습관을 버리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오래된 습관을 버리는 것은 힘들다. 하여 무너져내리는 삶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는 것, 이것이 지금 몰락해가는 중산층의 삶의 풍경이었다.
문제는 남은 날들이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미래의 파국은 이제 뉴스조차 되지 못하며, 실제로 몰락의 도미노는 중심부로 확산되고 있었다. 아직까지 오래된 습관을 반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극소수만이 중산층적 삶의 양식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가 없는 전략, 다시 말해 아무런 전략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더이상 미래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은 이미 완벽하게 일회용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파산한 삶을 외면한 채 값싼 즐거움으로 도피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습관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차라리 자신의 미래를 은행에 저당 잡히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여전히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자신이 무언가를 선택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본에 의해 세밀하게 계산된, 철저히 규격화된 컨베이어 벨트 위에 누운 채 이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항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다시 나오는 순간까지, 여행의 모든 과정은 쇼핑과 동일하다. 전세계의 유명 대도시들은 여행자들을 위한 관광 프로그램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기내 잡지에는 각광받는 클럽의 리스트, 최근에 재개발된 다운타운에서의 쇼핑 팁이 실렸다. 건물을 뒤덮은 낙서 또한 관광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편, 사람에 의해 추천됨으로써 은밀한 매력을 잃은 장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로 재포장되었다. 여행자들은 한편으로 트렌드를 쫓으며, 한편으로 가장 독특한 것을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탐험할 것이, 어떤 새로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미 발견되었고, 재발견되었다.
마침내 열광의 지속이 불가능해질 때, 즉 더이상 환상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깨어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깨달음 대신 냉소주의로 도피한다. 나는 다 안다. 다 해봤다. 그게 냉소주의자의 기본 입장이다. 여행이 인생을 바꾸어놓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소비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똑똑한 냉소주의자는 꿈을 꾸는 대신 세련된 소비자가 되는 것에 만족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여전히 꿈을 버리지 못했다. 여전히 환상 속에 있다. 그가 소비를 지속하는 한, 포기하지 못한 꿈 또한 계속해서 거기에 잇다. 물론 안다. 꿈을 사는 것이 꿈을 이루는 것과 다른다는 것을. 돈을 주고 산다고 해도 그것을 손에 넣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돈과 소유를 연결짓고 소유의 개념을 비난하지만, 사실 그건 틀렸다. 우리는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다.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것은 소유했다는 환상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비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그 환상을 유지한다. 그렇게 환상이 유지되는 동안,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탕진되며 마참내 고갈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남는 것은 탕진의 기술이다."(김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