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그늘 속에서 법을 지탱하는
"라캉은 이러한 법과 욕망의 역설적 결합을 구조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법과 욕망은 금지와 위반의 기능으로서 하나로 결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법이 금지를 낳고 금지된 것이 욕망을 낳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법을 위반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 법의 존재 자체의 정당성을 지탱해주기 때문이다. 욕망은 위반을 하면 금지된 것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에 기초한다. 상징적 거세, 그 감산의 작업에 의해 남겨진 차액(a)을 가지고 원래의 전체성이라 '추정되는' 것을 구성해내는 것, 그것은 환상의 다름아니다(S/◇a).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환상인 이유는, 애초부터 그러한 전체성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언어의 주체로서 분열되어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결여를 충족시켜줄 것 같은 대상과의 만남은 원래부터 불가능하다. 금지는 그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고, 위반은 그러한 '불가능성'을 '금지'라는 알리바이로 바꾸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속임수이기 때문에, 이는 법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 법의 그늘 속에서 법을 지탱하는 것이다. 위반의 논리는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가능성을, 그것을 금지하는 또 다른 타자를 상정함으로써, '타자는 존재할 수 있다'로 바꾸는 것이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도식 생략)
처음에는 A/가 있을 뿐이다. 이는 주체가 S/인 것과 상관적이다. 주체의 결여는 타자의 결여와 한 쌍이며, 주체의 결여를 충족시켜줄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위반은 S/와 A/ 사이에 A'를 상정한다. 마치 A'가 S/와 A/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고 금지한다는 것이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금지 속에서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 탄생한다. 이 욕망 속에서 A/는 A로 수렴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또한 욕망은 바로 그 '타자가 존재하리라'는 환상에 근거해 한층 더 가속화된다.
금지, 위반, 환상, 이렇게 해서 법과 욕망의 매듭이 구성된다. 사드는 바로 이 매듭 앞에서 멈추었다 (...)"(맹정현, <<리비돌로지>>, pp.299-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