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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단절 사건 예외

공장장_ 2018. 9. 3. 13:52

   "(...) 가장 좌파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사상가들이 기독교 신학의 문제설정에 기반을 두고 급진적인 정치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어뜻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실 이들의 입장은 현재의 이론전 정치적 정세의 특징을 뚜렷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자유주의 정치의 위기에서 그 이유를 차을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유일하게 보편적인 정치체 또는 정치 원리로 자부하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보편적인 정치적 가치가 퇴조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이주 및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과 인종주의, 민족 갈등이 확대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자유 민주주의 정체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실효성 있는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위기의 뿌리로 지목되면서, 자유 민주주의적인 정체 자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근본적인 정치에 대한 요구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이와 관련하여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곧 자본주의의 종언을 어떻게 사고하고 또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가? 자본의 시간성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 같은 질문이 메시아주의 정치를 불러온 핵심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가 2008년 위기 이후 붕괴하거나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됨에 따라, 신자유주의의 종말, 자본주의의 종말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좀 더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메시아주의로 나타날까? 그것은 '종말', '단절', '사건', '예외' 같은 범주들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시간성이 압도적인 질서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것과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시간성,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성을 사유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종말과 단절, 새로운 시작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전통적인 메시아주의 사상, 특히 정치신학 사상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할 수 있다. 더욱이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고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보편적인 해방 계급, 곧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주체성에 대한 믿음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단절과 새로운 시작의 사건을 사유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메시아주의, 또는 종말론은 종교 내지 신학으로의 퇴보를 뜻한다기보다는 종말론의 종교, 메시아주의 신학에 담겨 있는 철학적 통찰과 그 실천적 함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현재 전개되는 좌파 메시아주의의 또다른 특징이 나온다. 그것은 이러한 메시아주의 정치가 매우 사변적인 정치학이라는 점이다. 바디우, 지제크, 아감벤과 같은 대표적인 좌파 메시아주의 이론가들 중에서 누구도(막연하고 일반적인 정식들을 제외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국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제시하지 않으며, 그것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동이나 조직에 관한 구체적인 성찰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수행하는 것은 철학에서, 신학에서, 이론 내에서의 작업이다. 더욱이 이들의 이론적 작업은 경험적인 현실 구조를 다루는 사회과학과의 연계 속에서, 그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사변적인 역사철학이나 정치신학, 문화이론적 차원의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항상 혁명과 봉기, 사건, 단절을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종말을 외치며 메시아적 시간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변적인 차원에서의 성찰이고 호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수행할 만한 혁명적 주체와 그 조직 형성에 관한 고민이 없을뿐더러, 이들이 단절을 외치는 자본주의 질서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관한 면밀한 분석도 수반되지 않기 때문이다.(진태원,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 알랭 바디우, 슬라보이 지제크, 조르조 아겜벤의 국내 수용에 대하여>, <<황해문화>> 2014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