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자의 맹목
"헤겔은 1798년에 쓴 한 소품에서 도박을 좋아하는 것은 근대인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하면서 심오한 이성의 소유자들은 도박에 서투르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도박자(노름꾼)들은 이기는 것보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정열의 동요(불안)에 관심이 있는데, 이는 이성의 목표인 심정의 고요함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비평이 도박이라는 이유를 받아들인다면, 창작자는 도박에 서투른 사람이고(즉 도박이 불러오는 정열의 동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비평가는 도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불안도 존재하지 않는 <예의바른> 비평은 이미 죽은 비평(또는 서투른 소설을 쓰는 비평)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도박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진정한 도박자는 돈(성과)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돈을 무가치하게 여긴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박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지기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박판에는 (이길 수 있는) 어떤 법칙이나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박판은 완전히 우연성의 공간이라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대체로 항상 이기는 자가 이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바꾸는 규칙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룰렛 숫자판만을 뚫어지게 봐서는 소용이 없다. 왜냐면, 어쩌면 가장 근원적인 규칙은 배팅하는 사람 자신에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짜 도박자는, 룰렛의 숫자를 확률적으로 조합한다면 판 자체를 통제할 수 있는 규칙을 얻게 될지 모른다는 환상을 갖기보다는, 도리어 배팅 자체와 배팅하는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그때그때 도박판을 장악하는 규칙을 생산해낸다는 말이다. 바로 이럴 때, 도박자의 맹목은 승기에 대한 <과대평가>가 아닌 <통찰>로 승화될 수 있다.
이를 문학동네에 적용하면, 비평가는 이미 주어져 있는(그러므로 자명하게 여겨지는) 문학판만을 가지고 그것들의 지형도(성좌군)를 그리는 것에만 매진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비평가라는 존재)과 자신의 비평행위 자체에 대한 깊은 반성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도박으로서의 비평>은 <장식적 미美의 귀환>을 환영하는 잔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 제는 우리 앞에 차려진 새로운 도박판(<근대문학의 종언> 또는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서 <근대비평 이후 비평>의 운명 역시 결정될 것이다."(조영일, <비평의 운명 : 황종연과 가라타니 고진>, <<작가세계>> 2007년 봄호)
// 흥미로운 글이지만 의외로 붕 뜨고 심상한 결론. 나한테 근대문학의 종언은 뭐랄까 고진이 (문학비평가로서의 본인을 소진하는 대가로) 잘 깔아준 판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면 절절하고 담백하게 쓰인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더없이 위악적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문학은 끝났을 수 있지만 그런들 문학의 역할이 사라진 것은 전혀 아니라고 나는 믿는 편이다. 아니 애초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데, 만약 그렇게 보인다면 빙하기에 있던 얼음들이 간빙기에 진입한 정도가 아닐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과 문학의 효과를 혼동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말이다. 여하튼 얼른 고진을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