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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수 있는 미래이고 없을 수 있는 미래

공장장_ 2018. 10. 1. 20:43

  "처음부터 인간 현존재는 홀로 주체가 아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세계-내-존재에 근거해서 세계는 그때마다 각기 이미 언제나, 내가 타인과 함께 나누는 그런 세계인 것이다.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세계이다. 안에-있음은 타인과 더불어 있음이다. 타인의 세계 내부적인 자체존재는 공동 현존재이다."(GA2, 166:원문 강조) (...) 더 나아가 현존재의 세계는 언제나 '언어적' 공동세계이며, 이 속에서 타인의 흔적은 결코 지울 수가 없다. 

  하이데거는 타인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타인'은 나를 제외한, 내가 그와는 구별되는, 여타의 사람들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은 사람들이 대개는 그와 자기 자신을 구별하지 않고 그 속에 같이 속해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GA2, 166) 여기서 타인은 생각하는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설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근대적 홀로 주체의 대립항으로 설정되는 타인이 아니다. 차라리 여기서의 타인은 나를 포함하고 있는 '우리'다. "대기는 그것과 자기 자신을 구별하지 않고 그 속에 같이 속해 있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타인은 내가 아니면서도 나와 구분되지 않는 우리다. 나는 그런 우리 속에 던져진 존재이고 우리와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는 '우리-내-존재In-Uns-sein'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연관하여 일상적인 타인, 즉 일상적인 우리의 모습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다스 만das Man'이다. 기존 번역서를 살펴보면, 다스 만을 '그들', '세인' 등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은 아니지만 '우리'라는 뉘앙스가 빠진 번역어들이다. 이 번역어들에는 다스 만을 자기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들로 설정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다스 만을 '우리'라고 번역하려 한다. 다스 만은 일상적인 우리, 그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속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된다. 즉 그것은 거부하기 힘든 내 안의 타자이다.(그러나 대개 우리는 다스 만을 자기와 혼동한다.) 현존재는 처음부터 더불어 있음이다. 그렇기에 타인을 만날 수 있다.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가능근거가 이미 자기 안에 있는 더불어 있음Mitsein이다. 그런 현존재가 매일매일 만나는 타자는 '우리'다.

  그렇다면 타자가 아닌 자기는 누구인가? (...) 여기에 대한 하이데거의 답변은 명확하다.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다. 분명 고정된 이 모습은 내가 아니다. 여기서 본래의 자기란 끊임없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고 '자유'임이 밝혀진다. (...) "본래적인 자기 자신의 존재는 '우리Man'에서 분리된, 주체의 예외적 상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적인 실존 범주의 하나로서 '우리'의 실존적인 변양태existentielle Modifikation의 하나이다"(GA2, 181:인용자 강조)"


  "인간은 미래적 존재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형태의 미래를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본래적인 미래와 비본래적인 미래가 그것이다. 먼저 비본래적인 미래는 우리가 미래를 선취하는 것을 넘어서 미래를 조작 통제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등장하는 미래다. 실상 그것은 현재의 이익, 현재의 보존을 위해 미래를 통제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에 비해 본래적 미래는 조작과 통제의 대상일 수 없다. 하이데거식 미래는 유한한 미래다. 즉 끝이 존재하는 미래다. 불가능성 앞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미래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무엇인가 '아닐 수 있는' 미래이고 '없을 수 있는' 미래다. 무와 부정성으로 점철된 미래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님'으로 침윤된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다. 결국 그것은 텅 빈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다.

  따라서 본래적인 미래를 선취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예측 불가능한 부정성의 시간을 회복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럴 때 인간은 실존적 동요와 불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존재의 기우뚱함은 불가피하게 견뎌야 하는 것이지, 요령껏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것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그는 본래적인 자기존재와 대면하지 못할 것이며, 결국 자기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결국 미래를 선취한다는 것은 예측불허의 시간을 회복하는 것이요, 불가피한 존재론적 불안을 경험하는 것이요, 그 불안의 동요 속에서 자신을 창조적으로 형성하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자, 결국 존재를 포용하는 시간적인 존재로서 텅 빈 자신이 되는 것을 뜻한다."(김동규, <<철학의 모비딕>>)



// '우리'라는 말로 1인칭을 써보지 않은 사람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