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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간표에 의거해서 말살된 삶의 장소를

공장장_ 2018. 11. 8. 20:43

  "문화와 문명의 소통과 교류는 장소의 고유성을 전제로 한 번역으로 이뤄진다.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인권 같은 근대 유럽의 보편사상이 원본이라면, 비유럽의 근대화는 그것을 번역하려는 노력으로 실현됐다. 그런데 유럽중심주의가 내포하는 문제점은 비유럽이라는 장소에 고유하게 내재된 '공간정신'의 특이성과 차이를 말살했다는 것이다. 공간은 외부의 어떤 것으로 채워져도 상관이 없는 균질적인 빈 곳이지만, 장소는 사람들의 삶의 무늬로 수놓아진 의미의 세계다. 인류 역사는 '추상적인 공간'을 시간 속에서 거기 살았던 인간들의 노력과 경험이 축적된 '구체적인 장소'로 변형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장소란 집단 정체성의 산실이다. 번역은 원본을 구체적인 장소라는 콘텍스트에 입각해 미셸 드 세르토의 표현대로 개념을 재사용하는 '창조적 소비'를 하려는 노력으로 이뤄져야 한다. 사카이 나오키는 번역을 '통약 불가능성'을 전제로 해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실천이라고 정의했다. 공간적 등가성을 산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소에 내재된 '공간정신'의 차이를 토대로 의미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 번역이다.

  우리는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태어났다. 특정 인간 집단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온 역사 공간은 문화와 전통으로 채워진 장소다. 하이데거가 인간은 '세계 내 존재'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한국이라는 장소는 존재의 고향이다. 한국이라는 '공간정신'의 차이에 의거한 근대의 번역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식민지 근대'로 이식됨으로써, 한국인들은 존재의 고향을 상실한 실향민이 되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가치관의 아노미anomie 현상이다. 이는 가치관이 붕괴되고 목적의식이나 이상이 상실됨에 따라 사회나 개인에게 나타나는 불안정 상태를 의미한다. 에밀 뒤르켐은 이로부터 발생하는 가장 큰 사회문제가 자살이라 했다.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근본 이유는 존재의 고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근대화는 되돌리거나 거부할 수 없는 보편사적 기획이다. 문제는 유럽이란 장소에서 발생한 근대의 번역을 한국이라는 장소성에 의거해서 의미화하는 작업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에도 국사 동양사 서양사라는 식민사관의 분류체계를 답습하고 있는 한국의 역사학이 이 같은 오역의 한 부분을 담당했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의 번역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유럽중심주의적 역사의 시간표에 의거해서 말살된 삶의 장소를 복원하는 역사의 '공간적 전회'를 해야 한다. 앙리 르페브르는 "각각의 사회는 저마다의 공간을 생산한다"고 말 했다. 여기서 생산된 공간이란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의미들이 함축된 '공간정신'의 산실로서 장소를 뜻한다."(김기봉, <<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