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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non-dupes errent

공장장_ 2019. 1. 10. 11:57

   "라캉의 '대타자' 개념에 대한 지젝의 정교한 설명이 여기서 아주 중요하다. 대타자는 모든 사회적 장에 전제되어 있는 집합적인 허구, 상징적인 구조다. 우리는 결코 대타자 자체와 조우할 수 없다. 대신에 그 대역들만을 대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대리자가 언제나 지도자인 것은 아니다. 가령 위의 백해 운하 사례에서 대타자의 대리자는 스탈린 자신이 아니라 그 프로젝트의 영광에 설득당해야 했던 소련 및 외국 작가였다. 대타자의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은 그것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홍보가 기능할 수 있는 것도 대타자에 구성적인 이러한 무지 때문이다. 실제로 대타자는 홍보나 선전의 수신자, 즉 개인들 누구도 믿지 않을 때조차 그것을 믿도록 요구받는 가상의 인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이 제시하는 사례를 하나 들자면 가령 현실 사회주의가 낡아 빠지고 타락했음을 몰랐던 이는 누구인가? 인민 중에서는 누구도 아닌데 이들은 그것의 결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부 관료 중의 누군가도 아닌 것이 그들은 모를 수가 없었다. 현실 사회주의의 일상적 현실을 알지 못한다고 간주된 혹은 알도록 허용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대타자였다. 하지만 대타자가 아는 것, 즉 공식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과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제 개인들이 결정하는 것 간의 차이는 결코 '한낱' 공허한 형식적인 차이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사회적 현실이 작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 둘 사이의 불일치다. 대타자가 모르고 있다는 환영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사회적 체계를 결합하는 그 비신체적 조직은 분해된다. 이것이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소비에트 국가의 실패를 '인정했던' 1965년 연설이 그토록 중대했던 이유다. 당의 어느 누구도 당의 이름으로 자행된 잔혹 행위와 타락을 모르지 않았으나 흐루시초프의 공표는 대타자가 이를 모르고 있다고 믿는 것이 더이상 가느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현실 사회주의는 그렇다 치고 현실 자본주의는 어떤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리얼리즘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은 대타자에 대한 믿음을 포기했다는 주장을 살펴보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 대한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유명한 정식화,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이 시사하는 것과 같은 대타자에 대한 믿음의 쇠퇴가 격발시킨 위기들의 복합체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프레드릭 제임슨은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의 한 표현이자 자본축적 양식이 포스트포드주의로 전환한 결과라고 주장할 것이다. 닉 랜드는 문화의 경제로의 포스트모던한 용해라는 자기도취적 해석을 제시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사이버네틱 형태로 업그레이드된 보이지 않는 손이 점점 더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을 제거하고 있다. 랜드의 1990년대 텍스트들은 사이버네틱스, 복잡성 이론, 사이버펑크 소설, 신자유주의의 종합을 통해 자본의 인공지능이 지구를 지배하는 미래상 인간의 의지를 쓸모없게 만드는 방대하교 유연하며 끊임없이 분열하는 체계 을 구축하고자 했다. 비선형적이고 탈중심화된 자본에 대한 선언문인 용해에서 그는 비활성 ROM 지휘 통제 프로그램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인간 안보 체계에 집중하고 모든 거시적·미시적 통치 장치를 떠받치는 을 무력화하는 것이 목표인 광범위하게 분산된 매트릭스-네트워크화 경향을 언급한다. 이것은 하나의 파괴적인 실재로서의 자본주의다. 여기서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디지털) 신호들은 상징계를 우회하고 따라서 보증인으로서의 대타자를 요구하지 않는 자족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순환한다.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명명할 수 없는 사물로서의 자본이지만, 또한 그들이 자본주의에 구성적이라고 주장했던 재영토화와 반생산anti-production의 힘은 없는 자본이다. 랜드의 입장이 지닌 문제 중의 하나는 그 입장의 가장 흥미로운 점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해 그의 입장은 어떤 순수한자본주의, 즉 내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오직 외재적인 요소들(랜드의 논리에서 이 요소들은 결국에는 자본에 의해 소비되고 물질대사를 하게 될 격세유전의 요소다)에 의해서만 억제되고 가로막히는 자본주의를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런 방식으로 정제될수 없다. 반생산의 힘을 제거하면 자본주의도 그와 더불어 사랒리 것이다. 유사하기 자본주의가 외피를 벗어가는’unsheathing 점진적인 경향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있는 그대로의 자본 탐욕스럽고 냉담하며 비인간적인 의 정체를 점차적으로 폭로하는 일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본주의에서 홍보, 브랜드, 광고 등이 야기한 비신체적 변형’incorporeal transformation은 자본주의의 약탈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다양한 형태의 외피sheathing에 의존해야 함을 시사한다. 현실 자본주의는 현실 사회주의를 특징지었던 것과 동일한 분할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기업들이 사회를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공식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 기업들은 사실 부패하고 무자비하다는 등의 널리 퍼진 앎 사이의 분할이 그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적 포스트모더니티는 겉으로 보이는 만큼 완전히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pp.7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