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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내 눈물마저 나를 배신하겠느냐

공장장_ 2019. 8. 2. 15:54

   "(...) 나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이 코리아',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 강북의 상가용 건물 등을 상대로 난이도 높은 세번의 공중 돌기를 감행한 덕분에 신 자산계층의 대열 끄트머리에 우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그건 두 가지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첫 번째는 적어도 내 가족만큼은 '정치'와 거리를 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속한 386 세대의 정치 엘리트들이 '민주와 반민주 구도' 아래 펼쳐 보이던 '진정성의 정치'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사실 우리 세대에게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5월 광주로부터 3저 호황을 거쳐 서울 올림픽에 당도한 기이한 1980년대. 나에게 그 시기는 첫사랑의 실패를 경험하고 친구 어머니의 부동산 투기를 목격한 시기였지만, 내 세대의 어떤 이들에게는 군부의 독재 정치에 맞서기 위해 '민중'이라는 관념적 대상을 향한 열정을 불태운 시기이기도 했다. 확실히 그들은 군사 정권의 폭압에도 이전 세대와는 다른 급진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서슬 퍼런 반공의 칼날 아래서도 거침 없이 혁명의 구호를 외쳐대곤 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민주화 투쟁의 성과로 '87년 체제'가 열리기는 했지만, 그 이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는 그들의 청춘에 종지부를 찍는 서글픈 사건이었다. 누군가는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오죽하면 내 눈물마저 나를 배신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들의 나이 이제 서른. 이념의 강철대오가 무너진 자리에서 변혁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전선에서 벗어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대기업과 언론사에 취업했으며 고시를 준비하거나 출판사를 차리거나 학원가를 전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진정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진정성은 전위에서 퇴각한 1980년대의 젊은 생존자들이 1990년대라는 "황폐한 세월"을 견디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공유한 윤리적 에토스 같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들이 과거에 남발하던 "비열한 기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사태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고안한 방어적 개념이기도 했다.

   확실히 10년의 시간이 흐르자 많은 것이 변했다. 1990년대의 반짝 호황 덕분이었을까?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1980년대에 모스크바나 평양 정도를 최종 목적지로 상상하며 떠났던 대항해가 거센 태풍에 휘말려 한없이 표류하다가 결국에는 도쿄 앞바다에 닿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짧은 호황에 뒤이어 1997년 외환 위기가 정권 교체를 동반하며 그들의 삶을 급슥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이 되자 그들은 중산층을 굳이 "프티 부르주아지"라고 낮춰 부르던 알량한 허영심을 발밑에 슬그머니 버려둔 채, 자기 가족의 생활 수준을 중산층의 눈높이에 맞추려 동분서주했다. 보수 일간지의 호명 덕분에 '386 세대'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게 되었짐나, 아버지 노릇이 주 업무가 된 그들 사이에서는 종종 "이게 사는 건가?"라는 물음과 함께 개혁에 대한 열망을 담은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옛 친구들과의 술자리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조차도 주식 시세와 아파트 분양, 자녀 교육 같은 화제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박해천, <<아파트 게임>>, pp.178-180)



// 근래 읽은 텍스트들 중 가장 슬프다 여전히 진보적인 사회인, 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역사를 위해 모든 걸 바쳤(다고 생각했)는데 역사가 그들의 편이 아니라면.. 물론 이 뒤에는 노무현 이야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