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불꽃과 타고남은 잔재들
"가혹한 캘빈주의의 교리에 의해 존재론적 궁지에 몰린 신도들에게 세속적 금욕주의가 새로운 낙원에의 희망으로 부각되었듯이, 천사 미카엘은 버림받은 아담에게 또다른 파라다이스에 대한 꿈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 새로운 낙원은 천상이 아닌 눈앞에 펼쳐지는 세속적 삶, 노동하는 일상, 그리고 아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중세적 낙토를 상실한 주체에게 근대적 유토피아가 꿈꾸어지는 순간, 아담은 낙원을 떠나 신세계를 향할 수 있는 심적 '행위능력'을 얻게 된다는 이 문명사적 변환의 모멘트를, 베버는 동시대 예술작품에 표현된 한 구절에서 징후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베버의 행위이론은 이처럼 자본주의가 단순한 경제시스템이 아니라 거기 연루된 행위자들의 심적 에너지를 조직하는(낙원을 꿈꾸게 하는) 마음의 시스템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시스템으로부터 창발하는 독특한 실천양식들의 기원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향한 욕망이 아니라 종교적 구원을 향한 강렬한 '꿈'이 있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꿈을 거세하는 차가운 합리성의 시스템으로 간주되는 자본주의는 사실 간절하고 절박한 몽상 에너지의 응집을 통해 형성되었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말미에서 베버는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개신교 윤리의 쇠락과 자본주의 정신의 기계화를 묵시록적 어조로 진단하고 있다(베버, 2010:365). 그러나 베버의 생각과는 달리 19세기 이후 완숙해진 자본주의 역시 행위자들의 실천양식을 규정하는 꿈을 제공하는 것을 멈춘 것이 결코 아니었다. 바우만은 미래의 꿈을 향해 현재의 만족을 포기하고 지연하는 것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근대성(근대적 행위)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있다. "근대사회의 기초가 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근대적 방식을 가능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만드는 태도/행동의 가르침은 만족의 지연(필요 또는 욕망의 충족, 즐거운 경험과 여흥의 순간의 지연)이었다. 미루기procrastination가 근대의 무대(혹은 근대적 무대라고 제시된 곳)에 진입한 것도 이런 체현 속에서였다"(바우만, 2005:251). 세넷 또한 자본주의의 핵심동력이 결국 "시간-엔진time-engine"의 발명, "미래에 보상을 받을 것이란 희망"의 발명에 있었음을 지적한다(세넷, 2009:95-6). 베버의 문제의식을 좀더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볼탕스키와 치아펠로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언제나 "자기 자식들에게 더 좋은 삶이 있다는 희망"과 "희망할 이유"를 제공함으로써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Boltanski & Chiapello, 1999:18, 28). 자본주의 정신은 행위자들이 자본주의에 실천적으로 연루되는 것들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서, 그런 실천들에 "매력적이고 자극적인 삶의 조망"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Boltanski & Chiapello, 1999:65)." (김홍중, 2016:206-7, 강조는 인용자)
오오. 더 좋은 내용도 많지만 이 부분은 놀랍군. 개인적으로 김홍중의 꿈에 대한 접근 시도가 흥미로운 이유는 예전에 동아리 세미나 발제할 때 김엄지의 <예지4>와 김사과의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에서 파국적 상황이 등장/난입하는 경로로서의 꿈에 대해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꿈과 파국이 내적으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는데(파국과 꿈에는 비현재성, 나아가서 불가능성에 공통점이 있지 않나 생각하고 말았다), 여기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저 두 소설에 존재하는 다른 공통점이 직장인이면서 권태를 느끼는 화자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