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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공동체를 위한 메모 1

공장장_ 2017. 7. 17. 03:57

  울고만 싶다. 여섯시 반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침대에 한 시간을 누워 양과 잠자리를 번갈아 수백마리를 세어도 선풍기 소리만 거슬리고 날은 덥고 잠은 안 온다. 아침 먹고 낮잠을 잔 탓인가? 오후 네 시에 마신 커피 탓인가? 잠들어도 도래할 미래가 없는 탓인가? 그냥 병인가? 스크린을 보는 것도 머리를 쓰는 것도 좋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그냥 누워서 뒤척이는 게 멘탈에 딱히 더 이로운 것 같지도 않다. 예전에 불면을 같이 앓던, 그러나 나를 제외한 서로는 알 일이 없던 친구들을 내 멋대로 불면의 공동체라 부르곤 했다. 이제는 나도 그들과 긴밀하게 연락하지 못하지만, 애초 모인 적 없는 사람들이므로 흩어질 것도 없겠지. 그러므로 이것은 여전히 불면의 공동체를 위한 메모이다. 불면의 공동체라는 말은 당연히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서 따 왔으므로, 그 책부터 펼쳐 본다. Hammock 듣는다.



브레히트가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말할 때 첼란은 말들로부터 진실을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은, 그것이 참으로 진실인 한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은 함부로 진실을 진술하기보다는 진실이 거주하는 고도의 언어적 구조물을 구축해야 한다. 시는 진실이 표현되(면서 훼손되)는 장소가 아니라 은닉되(면서 보존되)는 장소다. (...) 요컨대 문제는 언어를 대하는 태도다. 우리가 보기에, 재현해야 할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언어는 그 진실을 투명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느슨한 믿음은 미학적으로 보수적이다. 반대로 언어가 사태를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진실을 투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태도는 미학적으로 진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인의 코기토(cogito)를 '나는 언어를 의심한다, 고로 나는 시인이다'라는 명제에서 찾는다. 그 의심은 미학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시는 도대체가 그것이 시이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그저 행과 연을 나눈 수필에 머물지 않고 언어를 의심하면서 겨우 한 줄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자해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형태 파괴, 실험, 그로테스크, 난해, 소통 불능 등등으로 규정되는 특질들이 그 자체로 이미 유죄라는 식의 언사들은 그래서 공허하다. 그것들은 그 무슨 비정상성의 징후가 아니라, 시가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의심할 때 나타나는 어떤 진정성의 표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정시 vs 전위시'와 같은 따분한 구도 이전에 먼저 언어에 대한 태도가 있고, 그 태도가 미학적 진보와 보수를 규정한다. (16~17)



그들[마르크스, 랭보, 아방가르드] 이후의 세계를 사는 우리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세 명제를 쇠사슬로 묶어두어야 한다. 요컨대 제도와 인간과 예술의 동시다발적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 정치학과 윤리학과 미학은 한 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의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으로서 늘 우리 앞에 존재해야 한다. 예술은 가능한 차선이 아니라 불가능한 최선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 예술이 제도의 혁명에 먼저 나서면 나머지 두 혁명이 유예된다. 한국에서 '진보'를 자임한 문학이 대개 그러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길이 아니다.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 '가망 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야 셋 다 바뀐다.(19)



  수 년만에 다시 읽으니 이렇게 과격한 주장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 싶다. 신형철이 정치와 윤리와 미학을 한데 묶어 트라이포드로 만든 것은 저 셋의 각기 스스로를 믿다 넘어져 본 경험에 대한 나름의 처방일 터이다. 혹은, 작금의 곤경(언제나 있다)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저 셋을 합쳐야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종의 도구적 기획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무게중심이 실리는) 예술에게 두 개의 다리가 더 생겼다는 것은 그만큼 챙길 것도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제도와 인간에게서 '가망 없는 희망'이 요청되는 한 미학은 먼저 절망할 권리를 잃어버린 채 끊임없이 혁명의 컨베이어벨트 위로 뛰어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형철이 말하는 미학에서 요구되는 '태도'로 보인다. 이렇듯 구조적으로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는 언어는 분명 늘 불안할 것이며 우울과 불면에 시달릴 것이다. 내 말은, 그만 언어/미학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생존을 구실로 자신을 학대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현재의 환경에서 필연적이라고 해도 이는 인간과 제도에 대한 냉정하고 충분한 진단 이후에나 간신히 가능하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진보의 오래된 딜레마가 아닌가. 

  여튼 말의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그로부터 말을 의심하는 자세, 이것은 김홍중도 세월호와 오월의 경험에 비추어 언급한 바가 있다...만 다행히 충분히 졸려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