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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꿩을 본 적이 없으니까

공장장_ 2020. 3. 5. 23:08

이 난폭한 그리움이

 

 

이승훈

 

 

이 난폭한 그리움이

광기를 낳고

목마른 밤들을 낳고

밤새도록 물을 마시던

시간들을 낳는다

이 난폭한 그리움이

비 내리던 밤

전화를 낳고

깊은 밤 카페에 앉아

술을 마시던

나를 낳는다

사는 일이 피로하다고

담배를 피우며

낮은 소리로 말하던

이 난폭한 그리움이

나를 낳고

시를 낳는다

이 난폭한 그리움이

바로 시다

이 난폭한 그리움

이 하얀 폭력

이 미치광이 번개

이 재앙의 지진

이 캄캄한 수수께끼

날개도 없이

날개가 부러지는

이 난폭한 그리움

너는 알리라

내가 쓰는 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삶!

-<<밤이면 삐노가 그립다>>



편지

 

 

이승훈

 

 

그는 터벅터벅 걷는다 그는 편지를 쓰지 않는다 그는

되는 대로 그는 마지못해 그는 기계적으로 그는 형식

적으로 산다 그러니까 그는 인생을 내버려둔다 그는

인생을 허락한다 마음대로 해! 집을 나가든지 들어오

든지 네 마음대로야! 그는 인생과 싸우는 데 지쳤다

신물이 난다 그는 터벅터벅 걷는다 그는 고집하지 않

는다 그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강요하지 않는다 그

는 우상숭배자 그는 의례적인 그는 일상적인 그는 형

식적인 말에 감동한다 <안녕>이라는 말에 감동한다

<잘 가요>라는 말에 감동한다 <또 봐요>라는 말에

감동한다 그는 꿩이 그립다 왜냐하면 꿩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는 취미가 없다 그림같은 인생이다 거지

같은 인생이다 쓸쓸한 인생이다 그는 조금씩 조각이

난다 난 그를 위해 기도한다 당신도 그를 위해 기도

해요 오늘 저녁 기도해요 아멘이라고 기도해요

-<<밝은 방>>




그가 최후로 도착한 의자

 

 

이승훈

 

 

그가 최후로 도착한 곳은 의자다 의자에

도착하려고 30년 동안이나 헤맨 셈이군

그는 중얼대며 작은 의자에 앉는다 세상에

방은 없지만 의자는 있다 그는 의자에

도착했다 어제 저녁에 도착했다 물론 옛날

에도 도착했다 그러나 옛날엔 도착인 줄

몰랐다 도착이라고 믿은 순간 의자는 사라

지고 비가 내렸다 그동안 방을 꿈꾼 건 죄

였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어제 저녁 그는

의자에 도착했다 비로소 도착했다 아슬아슬

하게 도착했다 그가 도착한 의자는 그가 

도착한 방 아아 의자가 방이라? 그렇다 

쓸쓸한 남자에겐 작은 의자가 방이다 그는

낡은 쟈켓을 걸치고 모자를 쓰고 어제 저녁

의자에 도착했다 세상엔 그래도 의자가

있었구나 그가 최후로 도착한 의자여 그대

가 애인이다 사는 게 너무 피곤했으므로

작은 의자를 그대라고 부른다 그대는 최후

의 땅이며 믿음이며 횃불이다 그대가 그를

지켜준다 그대가 그대가

-<<밝은 방>>




어느 한국의 저녁

 

 

이승훈

 

 

어느 한국의 저녁에 한국의 노을이 진다

한국의 노을이 지는 어느 한국 아파트에

한국 시인이 한국 책상에 앉아 한국 노트에

한국 볼펜으로 한국 시를 쓴다 한국은 그의

나라다 한국의 밤이 온다 한국의 저녁이 가면

한국의 밤이 오고 한국의 밤 속에는 한국

시계가 있고 한국 구두가 있고 한국 모자가

있고 한국 불빛이 있고 갑자기 한국이 킥킥

웃는다 한국의 미소다 한국의 기인 밤 속에

한국의 기인 우수가 있다 한국 바람이 있고

한국 교수가 있고 그는 한국 안경을 쓰고

한국 담배를 피우고 한국 신문을 읽고 한국

말로 한국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그는

한국 여자와 살고 한국 여자를 사랑하고 그의

어머니는 한국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도 한국 어머니다 한국 산에 한국

어머니를 묻고 추운 한국 길을 돌아왔다

그는 한국 밥을 먹고 한국 빵도 먹고 한국

국수도 먹고 한국 맥주도 마시고 한국 파도

먹고 오뎅도 먹고 한국 양복을 입고 한국

생선도 먹고 오늘 밤 어느 한국의 아파트에 

앉아 한국 시를 쓴다 한국 양말을 신고

한국 담배를 피우는 그의 이름은 어느

한국의 저녁이다

- <<밝은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