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주머니에 능소화 한 송이씩 꽂고 돌아가는
현관에서 - 신동옥
미안해
줄곧 당신 이야기를 훔쳐다가 시로 썼어 모두 거짓말이야
모래시게를 뒤집을 시간이야 약속한
미래를 취소해 우리가 지은 이야기는 모두 소진됐어
아름다운 골목과 지붕과 하늘이 담긴 이야기마다
당신 삶을 덧대는 순간
느닷없이 내가 튀어나올지도 몰라
마침표가 찍힌
마지막 구절이 닫히기 전엔
한 편의 시로 집을 세울 수는 없지만
한 편의 시로 당신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누구도 삶을 바꿀 이유는 없으니까
이제 당신은 내가 아는 당신이 아니다
하지만 더 이상 누구도 아닌
바로 그이가 당신이라는 게 더없이 좋아
가진 거라곤 호주머니 속 먼지뿐인 시절에는
그림자로 일렁이는 현관에 앉아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언젠가 문이 열리고 꽃이 필 거라고
말했지 이젠 괜찮다고
더는 무섭지 않다고
용기를 가지라고
언젠가 당신이 그린 집을 봤어
어디가 대문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게는 아직
당신과 함께 열어젖힐 문이 있어
삽을 들고 자갈과 흙을 덮을 구덩이가
당신과 내가 손잡고 뛰어넘거나 무너뜨릴
담벼락이 날아오르거나 주저앉힐
지붕이 첩첩이 뻗어가네
문밖에 저리도 조용한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율마는 지난겨울에 죽었어 그건 그냥
사과나무야 사과나무 지팡이라고 해야 하나
능소화는 대문을 넘어간 지 오래
꽃인지 이파린지는 중요치 않아 그건 그냥
그림자야 비질을 멈추고 여기 앉아봐
새싹으로 가득한 꽃밭은 어디 뒀나
누가 또 벨을 누르고 도망갔나봐
죽은 꽃이 담긴 화분에 고인 단단한 대기
철 따라 키를 맞춰서 향을 돋워도
귀뚜라미는 숨어서 울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마당 한 구석에서
넋을 놓고 섰다가 손을 털고 일어나
빤지르르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지만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늘 거울을 보고
나를 외면하는 연습을 했지
허물어지고
재개발된 다음에도 발굴되지 않겠노라고
어리석었다
새 시대를 대출받으려 했다니
여기 앉아 있으면 먼지가 자꾸만
구석으로 모이는 게 보여
그게 단단히 뭉쳐 흙이 되고
꽃씨를 볼러 모아 바람이 지나는 것이
믿을 거라곤 삶뿐인 안부 속에서도
새잎 돋듯
대문을 새로 칠하고 골목을 쓸었지
아이들이 흥얼거리며 돌아올 오솔길
끄트머리까지 뻗은 작은 숲이 있으면
좋겠어 송천생고기 푸른선미술 해법수학
한아름슈퍼 모두 모여앉아
모두부에 약술 한 모금 들이켠 다음
뒷주머니에 능소화 한 송이씩 꽂고 돌아가는
잔칫상...... 언젠가
당신이 그린 집을 봤어
어디가 대문인지 모르겠어
어디가 대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