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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처럼

공장장_ 2017. 10. 31. 16:05

이승훈 : 네, 저도 시 우선으로 돌아오겠습니다.(웃음) 이제 생각해 볼 문제는 시인은 왜 비합리적으로 인식하는 걸까 하는 것입니다.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인식함으로써 객체화된 합리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불안이나 고독을 느낌에는 자기들이 합리주의적 세계관의 노예가 될 때 아닙니까? 다른 말로, 그러한 맹목의 세계에서 초월하고 싶은 거죠. 사실 시인들에겐 시작 또는 시적 창조가 초월의 한 방법 아닙니까? 그래서 시를 못 버리는 거죠. '나'로부터 '너' 또는 '이웃, '절대'의 세계로 가기 위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이 '벗어남'은 곧 참다운 자기 자신으로 됨이죠. 자기 동일성의 증명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자아야말로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세계 내 존재'인 현존재(Da-Sein)가 드러내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고보면 비합리적 인식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은폐되어 있는 사물들의 비밀 - 즉 '존재'를 떠올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표면을 파고들어 거기 비로소 섬광처럼 번쩍이는 어떤 것 - 비가시의 세계를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의 경우 존재의 신비는 야스퍼스가 강조했듯이 상징과 비유에 의해서만 그 면모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죠. 물론 상징과 비유의 형식 외에도 환상, 알레고리 등 아무튼 시적 이미지에 의하여 나타납니다. 그러고 보면 '시는 이미지다.'라는 말은 '시는 존재다.'라는 말로, 그리고 '시는 인식이다.'라는 말로도 환치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이 희구해 마지않는 어떤 빛의 세계, 어떤 비전의 세계... 그게 인식의 내용이라고 부연할 수 있겠습니다.


전봉건 : 점점 이야기가 철학 개론 풀이가 되는 것 같고 시학 개론 풀이가 되는 것 같아서 좀 뭣한 데다, 이승훈 씨가 시와 철학 사이를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을 하기에 솔직히 말해서 좀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나는 평소에 철학이란 부문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이번 대담에서 인식이다 존재다 실존철학이다 하는 것을 끄집어다가 말해 보겠다고 하기에 부랴부랴 철학 사전류를 들쳐 봐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시인은 왜 인식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이승훈 씨대로 대답을 해 주었으니까 나로서는 거기에 더 붙일 것이 없습니다만 이런 걸 생각해 봅니다. 예수하고 석가모니 있잖습니까. 이 두 사람이 내가 보기엔 비합리적 인식의 명수입니다. 그들이 그려 보이는 천국과 지옥이란 것. 이것이야말로 비합리적 인식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일상적 상식적 합리주의 가지고는, 백 번 죽어도 그런 걸 잡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짐작하시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시인이란 예수나 석가모니하고 상당히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와 석가모니를 자꾸 들먹거리는 것이 미안한 노릇인데요. 예수와 석가모니의 정직성, 지금도 세계를 떠받들고 있는 정직성, 그것을 무너지게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대들보 구실을 하는 것이 천국과 지옥을 잡는 희한한(비합리적) 인식인 것이라고 생각할 순 없는 것일까요?

   시인도 마찬가지예요. 시인이 현실 세계에서 스스로의 정직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란, 그것을 결코 굽히는 일 없이 지닐 수 있는 방법이란, 끊임없는 인식을 갖는 일, 그것밖에는 달리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의 정직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해둘 필요가 있겠군요. 불안을 불안이라고 말하고 절망을 절망이라고 말하고 고독을 고독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어둠을 어둠이라고 말하는 그것입니다. (...) 즉 아무리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도 처참함을 느끼는 일 없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정직성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입니다.(<시와 인식과 존재>, <<전봉건 VS 이승훈 대담시론>>)




이준규 : 시로는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없다. 표현 욕구 때문에 보통 시를 쓰기 시작하지만 시는 표현이 아니다. 시는 세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다. 분명한 것을 흐리게 하고 흐린 것은 과도하게 분명하게 하여 더욱 흐린 것으로 만들기 따위가 시다.

 

김태용 :잔이 잔을 비우고”() “풍경은 풍경으로 흘러가고”(밀다) “고양이색 고양이가 쥐색 쥐를 물고 가고 있다”(고양이) 등의 문장에서는 분명한 어떤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잠시라고 해도, 흐릿한 가운데 한순간이라 해도. 금붕어에서 “(수박의) 씨는 못 센다가 결정적이라는 생각을 했고 오랫동안 그 문장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할 때, 뭔가 글의 파장이 일어나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시의 어느 위치, 어떤 흐름 속에 서 자리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우고 흐릿한 것이 아니라 풍경이든 사물이든 뭔가 더 잡아 두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의 사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움직이면서(걸어가면서) 잡아 두려는 것 같다. 자신이 벌인 줄 알고 날아다니는 나비 같다는……. 좀 더 말해 달라.

 

이준규 : 그렇다. 지금 김태용 씨가 말한 것에 답이 있다. 질문에 답이 있다는 말이다. 그럴듯한 질문이다. 그렇다. 가령, 그것이 그런 것인 줄 누구나 아는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게 문학이다. 그런데, 문학은 보통 이야기나 이미지나 비유 따위로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환기한다. 그것은 의미 있는 행동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같은 문장을 다시 보여 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같은 것은 늘 다르다. 우리는 어떤 것도 그것이 그런 것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거대한 무지 속에 있고 그 사정은 수정되지 않는다. 우선 그것을 보라. 그것이 나비이건 벌이건 그것을 보라. 우리는 그것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는 말하는 벙어리이다. 나는 이 총체적인 무지를 조금은 수정할 수도 있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카프카, 조이스, 무질 등의 문학이 그런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단지 유명해지려고 그런 노력을 했겠는가. 그런 욕망만으로 문학을 했다면 그들은 그렇게 유명해지지도 그렇게 좋은 읽을거리를 생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작가는 예수처럼 진지해야 한다. 좀 변태적이고 무기력한 예수를 상상할 수 있다. 문학의 위치는 매우 애매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빈 의자 같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의자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엉터리라면 그 의자는 곧 치워질 것이다.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장난하지 말자.(<Joke>, <<시작>> 2012년 여름호)



// 두 예수는 어디서 만나는가? 즉, 정직성과 비합리성과 진지함은 어떻게 상관되는가? 늘 덧붙이고 싶은데 영 짬이 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