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지젝이 말하는 건 마치 거울상처럼 교차하는 두 가지 과정이다. 실재에 대한 열정은 실재의 스펙터클한 효과라는 순수한 가상으로 귀결되고, 가상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열정은 결국엔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의 폭력적인 회귀로 종결된다. 간단히 말해서 실재는 가상으로, 가상은 실재로 귀결된다. 지젝이 드는 예는 '가해자들cutters'이다. 대개는 여성들인데, 면도날로 손목을 긋는다든가 혹은 기타 방식으로 자해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하튼 우리 주변에서도 면도날이나 담뱃불로 자해하는 경우를 아주 드물지는 않게 볼 수 있다. 그건 어떤 의도에서인가? '현실 자체'를 주장하기 위해서, 단언하기 위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뭔가 사는 것 같지 않고 현실이란 실감이 나지 않아서다. 자해는 그런 가운데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확고하게 근거 지우기 위한 시도이다. "면도칼 자해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자해한 상처에서 붉고 따뜻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린 기분이라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9쪽) 물론 이러한 자해행위는 병리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정상성을 회복하고, 완전한 정신병적 붕괴를 피하기 위한 병리적 시도이다. 즉, 자해자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자이다."
"일상적 삶이 가상화되고 있어서 더욱 확고한 '실재적 현실'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된다는 점은 '자해자들'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초보적인 사실'이고, 지젝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돌아오는 실재', 다시 '귀환화는 실재'는 좀 다른 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실재'란 정의상 외상적이면서 과잉적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통합할 수 없다. 즉 현실이란 틈에 다 담을 수가 없다. 그것은 넘쳐난다. 때문에 실재는 언제나 악몽 같은 것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9.11 때 무너진 쌍둥이 빌딩의 이미지가 바로 그렇다. 그것은 '이미지'이자 '가상'이고 어떤 '효과'였지만, 동시에 '사물 자체the thing itself'였다.
만약 실재가 가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고 악몽으로만 경험된다면, 거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허구를 현실로 오인하지 말라"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장을 정확하게 뒤집어서,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현실의 어떤 부분이 환상을 통해 '기능 변화'되는지, 그래서 그것이 현실의 일부임에도 허구적인 방식으로 지각되는지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실재 현실real reality' 속에서 허구의 부분을 알아내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허구의 가면임을 폭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지젝은 덧붙인다. 라캉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동물들은 가짜를 진짜로 속일 수 있지만, 유일하게도 인간은 진짜를 가짜로 속일 수 있다고.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진짜 속에서 가짜를 가려내는 것이다. 실재적 현실 속에서 허구를 식별해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런 관점에서 지젝은 면도칼 자해자들의 사례도 다시 해석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실재의 진정한 대립항이 현실이라면, 자해자들이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진정 벗어나려는 것은 비현실의 느낌, 우리 생활 세계의 인공적인 가상성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 아닌가? 이 실재는 우리가 현실에 내린 닻을 잃어버리는 순간 출몰하기 시작하는 통제할 수 없는 환각의 모습으로 분출해 나온다.(<<실재의 사막>>, 34~35쪽)"(<<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이현우)
// 예전에 김사과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와 김엄지의 <예지4>에 대한 발제문을 쓰면서 소설 속 가위눌림과 악몽의 위치를 언급하고자 했던 적이 있는데... 그 소설 자체를 세미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지젝의 말을 빌리자면, c도 모종의 자해자인 셈이겠다. 더 비교해보고 싶지만 일단 옮겨만 두기로 한다.
"(...) 하지만 “뭐에 홀린 것처럼” “결심”과 “실행력”을 통해 섬에 도착한 c는,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 않는다. 기실 c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여자와 같이 자지도 않고 여자의 남편과 어떤 담판을 짓지도 않는다. c와 세계의 충돌은 여자의 남편과 (더없이 도덕적인) 악수를 나눈 것이 전부다. 거기서 “잡힌 느낌”을 받은 c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육지로 돌아온 뒤, 여자의 결혼에 대한 의견(“절대적인 것”)과 자신의 상상을 멋대로 결합시켜 ‘절대자지’를 탄생시킨다.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로 기능하는 그것은 자신의 “위대한” 힘으로 하여금 c의 무기력을 정당화한다, 즉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김사과가 신과 타인을 제거함으로써 “씨스템” 안에 숨겨둔 절대의 이미지를 김엄지는 상상을 통해 다시금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화자는 c에게 그것이 허상임을 지적하지만 c는 이미 엎드려 잠든 뒤이다. (각주 : 이 소설(그리고 <예지> 연작과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등의 소설들)속 인물들은 왜 이렇게까지 꾸준히 술을 마시는가? 넘겨짚자면 나는 이것이 현실을 꿈속에 밀어 넣음으로써 현실의 억압을 ‘가위눌림’으로 치부하려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무능력/무기력을 정당화하려는 몸부림이라고 여겨진다.)
허상·꿈은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의 중심에 자리 잡은 자신의 꿈속을 달리면서 화자는 (다소 갑작스럽게) 일련의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달린다. 곧 죽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 달린다. 종말은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순간의 차가운 빛이 아니다. 계속되는 불꽃과 타고남은 잔재들이다. 피해 도망칠 뿐이다. 도망쳐지지 않는다.” 다음날, b는 지각을 하고 이후의 술자리에서 그것이 ‘가위’ 때문이라고 토로한다. 가위란 무엇인가? “네가 꿈인걸 알고 있었는데도 깨어나지 못했다면, 그건 가위”다. 화자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나고 묻지만, “a, b, c는 일제히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답”한다. “치료불가능. 발작. 처치 없음”. 가위라는 증상을 통해 꿈은 현실에 틈입할 권능을 가지게 된다. b의 지각은 아주 사소한 예에 불과한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리를 바라보며 화자가 이렇게 탄식하기 때문이다. “아아. 이 장면은 분명히 꿈에서 본 것이다.” 그것이 가위인 이상, 화자는 꿈에서 깰 때까지 어떻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