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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쌓아올려진 이 모든 것이자 그것을 쌓는 데 인생을 탕진한

공장장_ 2018. 2. 5. 20:45

"우리, 우리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음악을 들으러 같은 공연에 가고 같은 영화를 보러 같은 극장으로 향하던. 같은 추억으로 얻어맞고 더렵혀진 우리들은 물론 같은 거리에 속해 있다. 같은 술에 취해 같은 거리를 걷는다. 같은 시간 같은 유머에 웃고 같은 불면에 시달린다. 같은 외로움, 버림받은 느낌에 운다. 같은 사랑에 빠지고 같은 이별을 한다. 이 늦은 밤 우연히 여기 모인 우리가 바로 그들이다. 끔찍하게 쌓아올려진 이 모든 것이자 그것을 쌓는 데 인생을 탕진한 바로 그자들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라니? 모두 쫓겨 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오직 그 점에서만 우리들은 동지가 아닌가?"


"처음 본 순간부터 그와 자고 싶었다. 자는 것만이 그의 진짜를 보게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이들었고, 유명하며, 모든 것을 경험햇다. 그러니 그가 정직해질 수 있는 순간은 그때뿐일 거라고, 그를 아는 방법은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그를 만났다. 그렇게 나는 그의 진짜를 봤고, 여러 번 지겹도록,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은 여자애들에게 익숙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지겹다는 말인가? 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좋겠어? 그는 대답 대신 웃었다. 내가 그를 찾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그리하여 내가 발견한 그의 진짜는 불면과 외로움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밀조차 아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아무런 비밀도 공유하지 못했고 그러니 우리는 연인조차 될 수 없다. 그렇게 나는 흔한 여자애들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나는 여전히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진짜를 훔쳐내려고 애를 쓴다."



  처음 읽을 때는 그냥 입 벌리고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비로소 의심이 가는 지점이 생긴다. 김사과의 이 강박은 무엇일까? 그러니까 우리의 '진짜'와 그의 '진짜'가 있을 거라는 이 믿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는 왜 눈 앞의 것을 진짜라 여기지 못(해 안달)하면서 진짜 같은 건 없다는 결론에는 이르지 않는가?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는 '역겨움'인데, 이것은 다분히 즉물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겨울 이유가 대체 뭘까? 모든 것이 역겨울 수 있다. 김사과 본인이 도시 밖의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가 하다못해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아니면 산 속에 들어가 네 발로 걷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그가 출가할 수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기만이라고 생각할 것일 뿐더러 본인이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역겨움은 결국 자신에 대한 역겨움, "모든 것을 다 알지만 다만 그 앎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하는 역겨움으로 환원되는데, 말하자면 문제는 도시 그 자체가(그것이 얼마나 후지고 추잡하고 더럽든)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문제는, 도시의 문제와 나의 문제는 불가분의 무엇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헌데 이 문제는 식보다 미지수가 많은 불능방정식 같은 것이다. (혹은 조금만 bias를 가지면 어떻게 해도 살아지는 부정방정식이 된다.) 수읽기에서 실수하지 않는 신과의 종국이다. 이것이 기형도로부터 단절된 00년대 이후의 도시 비가다.(90년대에는 무엇이 있었지? 허수경의 <먹고 싶다......> 같은 시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도시 밖은 떠나온 곳/돌아갈 곳이지 미지의 가야할 곳이 아니다) 김사과의 화자(그리고 독자)들에게는 미래 없음이 아니라 너무 선명한 미래, 하여 과거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미래가 문제가 된다. 탈-역사의 공간. 혹은 역사를 흡입하며 번식하는 공간. 말하자면 늪이다.



"그가 찡그린 채 눈을 감는다. 오늘밤 그는 잠들지 못할 것이다. 그에겐 지독한 불면증이 있다. 그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다. 잠을 빼앗긴 밤, 그는 늪으로 향할 것이다. 기적 없이. 그리고 우리 착란의 피난민들의 운명은......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벽에 부딪힌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다. 나는 부엌을 지나, 출구로 향한다. 문이 열린다. 아주 쉽게 그렇게 나는 그곳을 빠져나온다. 계단을 뛰어내려오는데 뭔가 사라진 것이 느껴진다. 어, 죽어버렸다. 신기하다. 나는 중얼거린다. 신기하다. 건물 밖, 어둠이 쓸려나간 거리는 새벽의 푸른빛이 채우고 있다. 새벽의 냉기가 폐를 채운다. 문득 내가 맨발인 것을 깨닫는다. 발에 닿는 바닥이 얼음처럼 따갑다. 텅 빈 거리, 잠에 빠진 상점들의 쇼윈도에 내 모습이 비친다. 하지만 비치는 저 형상은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여기는 어디인가. 내가 알던 거리는, 내가 알던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아아, 기억난다. 그들은 늪으로 향했다. 그뒤는 모른다. 저기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저자들을 더이상 모른다. 여기는 내 거리가 아니다. ......향해 걷는다. 해가 떠오른다. 햇살 아래 깨어난 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걷는다. 더 나쁜 쪽을 향해 걷는다."



아주 쉽게 문이 열린다. 신기하다. 한때 도시는 발생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내부의 중력에 스스로 붕괴되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우주에서 보면 이토록 우스운 일이 없겠지. <유전적 알고리즘으로 ~ 학습시켰다> 시리즈를 본 적 있는지? 무슨 느낌이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