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시간은 더 이상 삶의 신성한 조건이기를 그치고
공장장_
2018. 2. 8. 21:30
"'여기와 지금'이라는 구체성을 폐기할 수도, 폐기할 의지도 없는 인간 정신의 나약함과 그것이 앓고 있는 향수병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인간이 우주 내에서 얼마나 버림받고 무력한 존재인가를 증명해 주는 연약함으로 보는 것이 그 하나이고, 인간 정신 구조 내에 갈무리되어 있는 근본적 진실의 흔적으로 보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17세기의 파스칼은 새로운 계산법들에 의해 야기될 전례 없던 광범위한 파멸을 인식하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이 무자비하게 확장됨에 따라 과거는 망실되고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했다. (무(nothingness)라는 단어가 이런 절대적인 뜻으로 처음 쓰인 것은 17세기였다.) 신은 죽음이라는 영원의 영역에서 살기 위해 삶을 버린다. 신은 더 이상 시간의 회전 속에 존재하지 않고, 더 이상 이런 회전의 축이기를 마다하면서, 존재를 기다리는 하나의 부재가 되어 버렸다. 온갖 계산법들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고 또 앞으로도 기다릴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아침이 오고 계절이 돌아오며 아기가 태어나는 것에서 신의 존재를 확인하던 시대는 끝나고, 신은 천국과 지옥의 '영원성'에서 또 최후 심판의 종국성에서만 확인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이제 시간에 그 운명을 맡긴다. 시간은 더 이상 삶의 신성한 조건이기를 그치고, 가차없고 비인간적인 원칙이 되어 버린다. 바야흐로 시간은 선고와 처벌이 된다."(<<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버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