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벼락을 맞은 듯 연장을 놓고
유희로서 노동
17세기 이후 서구 사회에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유희가 사라졌다. 노동이 놀이의 성격을 잃은 것도 그 과정에서였다. 고전적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과 유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분리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다. 즉 그의 노동은 임금을 지불하는 자본가에게 속한다. 노동이 유희의 성격을 잃은 것은, 자본가들이 자신들이 산 노동 시간이 불필요한 요소(놀이)로 채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자들 자신의 삶은 공장 문을 나서는 순간에 시작된다. 그래서 작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에 그들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연장을 놓고 퇴근하려 한다. 이 소외를 극복하려면, (혁명으로) 소유의 사적 성격과 생산의 사회적 성격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이 생산수단을 소유한 곳에서 노동은 강요된 활동이 아니라 자발적 활동이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 활동일 때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이 해방된 생산력을 토대로 인간은 더 이상 물질적 필요라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유롭게 창조하게 된다. 노동을 유희화하려는 시도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먼저 이루어졌다는 것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다. 구소련을 비롯해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노동자들의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별 개인별 경쟁을 시켜 우승자에게 노력훈장을 수여하곤 했다. 이 '노력영웅' 게임은 비자본주의적 보상 체계로 고안된 공산주의적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의 예로, 소유욕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노동자들의 노동에 물질 대신 재미와 명예로 보상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동원된 노동일 뿐, 물질적 필요에서 자유로운 창조와는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게이미피케이션이 늦어진 것은 더 강한 인센티브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인'으로서 자본주의적 인간은 재미나 명예가 아니라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기에, 자본주의는 굳이 또 다른 유인을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고전적 자본주의가 강하게 기호성 미학성 유희성을 띠면서 그 안에 사는 인간들의 욕망 구조 자체가 변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임금이 더 이상 경제활동의 유일한 유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즉, 높은 임금을 포기하고서라도 제 적성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러자 이른바 '펀설턴트funsultant'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여 '퍼니피케이션funification'을 주장하게 된다. 자본주의 자체가 자신을 작동시키기 위해 물질이라는 외적extrinsic 동기를 재미라는 내적intrinsic 동기로 바꾸어놓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진중권, <유희로서 노동>, <<슈퍼휴머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