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외부나 대안을 상상할 수 없는 걸까. 왜 꿈은 처음부터 저무는 모습을 전시했을까. 내가 좋아하는 문학들은 모두 혁명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실패하거나 폐기된 가능성이었다. 책을 읽는 내가 그들의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잡스러운 폐기물을 들쑤시고 있을까. 나는 왜 서서히 신기루로 사멸하고 있는 문학 세계의 오타쿠가 되었을까.

   과거엔 일자로 존재하는 지엄한 페니스가 존재했던 것 같고 나는 혁명을 이러한 제왕적이며 권위주의적인 폭력을 고꾸라뜨리는 힘의 쟁의로 상상해왔다. 현재 전선은 좀 더 복잡해졌다. 자본은 자신에게 가해진 충격을 무력화하며 신경질적으로 결백해졌고 쉬이 배척할 수 없는 자연법이 되었다. 차이는 윤리감각을 공유하는 치열한 대화의 지평을 상실한 채 균질한 몰이해의 영역으로 전락했다. 페니스는 어디에나 있으며 투명하게 희석된 낙진처럼 비가시적이고 쉬이 판별할 수 없는 근접성으로 모두의 정신을 아주 따분하게 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자본은 인류 전체를 미달된 페니스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미달된 자리로 역사의 극우적인 판본이 들어선다. 파시즘과 남성성, 소진된 이데올로기적 환영을 복기하면서 그들은 문학의 타자가 된다. 미달된 생식기를 위로하기 위해 잘 제작된 환영들이 배회한다. 이 반지성적 물신들은 페니스의 회복과 발기불능의 해소를 허구적으로 약속하는 미혹의 문화를 형성한다. 거세된 권력을 상상적으로 상속받는 셈이다. 교양으로서의 문학은 이러한 다수의 환영들 앞에서 근본적으로 무력하다. 문학이 만일 타자를 환대하는 방식이라면 결국 문학은 이렇게 뒤바뀐 타자를 조망할 수 없는 벙벙한 당혹감 속에서 이들을 배제하기 위한 느슨한 비판과 관계주의적인 미몽을 복제하며 문학 내부의 공동감각을 피상적으로 재확인하는 데 그치고 만다. 문학 또한 환영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환영을 교란하는 빈사의 환영으로 환영에 항변한다. 이 하나마나한 말이 아직도 유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기말 이전의 그림자들이 전망을 위해 솎아내야 할 가느다란 실마리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문학의 방법론과 그 역능은 무용해졌지만 활성화된 근대적 유산들은 폐허를 먹어치우며 무량하게 증식하고 있다."


   "들이닥치는 정지와 급제동, 제한을 받아들이는 일은 문학적 감수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출구를 모색하는 샛길을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문학은 언제나 완전한 자유를 열망하지 않았다. 건강한 회복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것이 페니스의 치유와 자유라면 더더욱 그렇다. 문학은 스스로 설치한 부자유, 그 해괴하게 뒤틀린 스타일과 히스테리, 강박관념의 무모한 중계를 통해 언제나 예기치 못한 장소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구원, 헛되이 주어지는 기만적인 위로 , 세계의 담벼락을 월담하는 휴거를 원하지도 , 억압적 현실을 깨뜨릴 수 있는 결정적인 해결과 대답을 욕망하지도 않는다. 나는 내가 정의하는 세계와 문학이 무한히 훼손되길 바란다. 내 수다스럽고 아둔한 자의식이 여러 차례의 사망 선고 이후에도 좀처럼 죽지 않을 문학에 대한 미결정적인 눌변과 다변으로 어지러워지길 바란다. 내 욕망은 세계와 자아의 억류된 플롯에 속해 있다. 그러나 눈먼 욕망이 자욱한 어스름 속에서 플롯의 내벽을 더듬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까닭은 그저 욕망에겐 이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냉소주의자들이 대안의 절멸과 의지의 소진을 섣불리 진단한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글쓰기의 신체란 그저 잘린 채로 꿈틀거리는 사활의 잠재성이기 때문이다. 이 망설임, 어눌한 손동작, 휴지(休止)와 전략적인 포복, 앎과 무지의 교차는 볼모로 잡힌 용기가 상황 자체를, 물론 이전의 사례들처럼 크게 바꾸진 못할지라도, 끈질기게 어지럽히고 있는 혁명의 징후일 수도 있다.

   나는 나의 혁명을 살고 당신은 당신의 혁명을 살며 이곳은 망했지만 또 충분히 망하지 않았다. 나는 더 극단적으로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나는 망한 장소에서 얼굴에 재를 묻힌 채 쇠꼬챙이로 고철의 무덤을 쑤시며 망가진 브라운관이나 녹슨 고물들을 취급하는 유령이기도 하다. 나는 입장이 없지만 내 입장에 공습을 퍼부을 자신은 있다. 더 못생겨질 자신 또한 있다. 애써 빚은 생각을 철회하고 무너진 회랑의 비좁은 개구멍을 기어갈 자신이 있다. 내가 당신의 혁명과 접촉한다면 내 의지와 관능을 기꺼이 망가뜨릴 자신 또한 있다. 가능성이 종말에 다다랐다면 나는 여기 서서 감추어진 수많은 혁명의 종말과 그 기각된 실천을 되풀이해서 외울 수 있다. 이제 내가 상상하는 혁명은 구멍 파기처럼 보인다. 예외와 빈틈을 허락하지 않았던 세계는 누덕누덕한 구멍들의 아우성이 된다. 지하의 땅굴로 접속하거나, 뭐 접속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개미굴의 우주가 된다. 세계는 손바닥처럼 단번에 뒤집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을 시끌벅적한 소란으로 이해하는 게걸스러운 나의 구더기들은 이 사유의 저지대를 열심히 좀먹을 수는 있다. 나는 인내하고 있지만 매일 인내하지는 않는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일이 기리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양선형, <근대인이 하는 문학>)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