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식도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자격증 시험공부를 하며 그런 사례를 자료에서 보기도 했다. 가본 적 없는 곳의 정보가 새롭게 기억에 입혀지는 것처럼 경험하지 않은 것을 경험하였다고 믿는 일들. 시온은 형에게 특별한 현상이 나타나거나 부작용이라고 할 만한 증상이 생겼던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보통 꿈이 뒤엉키거나 무언가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태인씨는 제 생활을 보았다고 했어요. 시온은 그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냥 지금의 상황들 내가 이렇게 서 있고 앉아 있고 무언가를 강하게 바라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에요. 그것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을 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자신을 볼 수 없을 때 자신을 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시온의 얼굴은 이전과는 다르게 평평하고 차분했고 태식은 형이 무언가를 본다면 바로 지금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식은 다시 한 번 손을 씻고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형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무언가를 보았다면 지금도 볼 수 있겠지 생각하며 형을 내려다보다 형이 누운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바닥에 누웠다. 내가 형의 얼굴을 본다면 형도 나의 얼굴을 본다. 오로지 잠을 자기 위한 목적의 방에 누워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곧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아 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 형의 얼굴을 내려다보는데 서로가 서로를 볼 수 밖에 없다는 긴장감과 부담감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각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무게를 어깨에 메고 서 있는 것. 한참을 형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태식은 방을 나왔다."(<이 방에서만 작동하는 무척 성능이 좋은 기계>)

 

"결혼식장은 빛으로 환했다. 태인은 결혼식장 안에 있지도,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서 그곳을 보는 것도 아닌 조금의 거리를 두지만 자세히 살필 수는 있는 곳에서 식장을 바라보았다. 태인이 동면을 하는 동안 본 것은 시온의 결혼식장이었다. 그곳이 정말 결혼식장이었는지 아니면 이전에 가본 성당이었는지 어떨 때는 그저 넓은 테이블만 준비되어 있기도 했다. 넓은 테이블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벌어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태인은 그곳이 시온의 결혼식장이라 생각했다. 흰 테이블보가 덮여 있고 창에서 햇살은 비스듬히 내려오고 아주 먼 곳에서 음악이 들렸다. 직접 연주하는 것 같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시온이 결혼을 하는구나. 너는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니. 태인은 동면중일 때면 늘 시온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을 다른 동면자들이나 가이드들은 다르게 부를 것이고 흔히 경험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할지 착각 중 하나라고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태인은 동면중일 때면 늘 시온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을 다른 동면자들이나 가이드들은 다르게 부를 것이고 흔히 경험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할지 착각 중 하나라고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태인은 동면중일 때면 시온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볼 수 있었다. 그것을 확실하게 되었던 때는 시온이 태인의 가이드를 맡았을 때였다. 태인은 시온의 움직임과 흐름을 생생하지만 편안하게 느낄 수 있었고 두 사람을 연결한 흐름이 어딘가에서 부드럽게 물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태인은 동면중인 자신의 상태를 의식하고 있는 셈이니 이것을 바람직한 동면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태인이 있던 곳은 편안하고 상쾌했고 시온의 감정적 흐름이 빗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커피 향이 퍼지는 것처럼 의심 없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화가 나거나 불쾌하지 않았고 괴롭지 않았다. 자연스러웠는데 조금 슬펐고 그래서 편안했다. 태인에게 자신이 쓰고 있는 베개와 침대가 보였다. 원래 쓰던 것이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자신의 것이었다. 태인이, 태인과 시온이 아니면 어떤 힘이 만든 그곳은 태인이 가진 적은 없지만 익숙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두 사람은 그곳에 머물 수 없다. 그것은 과거라고도 추억이라고도 할 수 없고 어쩌면 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일지도 모르겠지만 태인은 그것을 반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정확하게 스스로에게 설명하며 결혼식장의 문을 닫고 나왔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빛으로만 가득차 있었다. 돌아서는 목덜미와 등에도 햇빛이 따뜻하게 쏟아지고 있었다."(<일요일을 향하여>)

 

 

// 발목에 얼음찜질 하면서 침대에 무너진 자세로 읽었다. 나머지 단편들은 최소한 두세번씩 봤는데 <이 방에서만..>과 <일요일을 향하여>는 처음 읽었고 동면에 대한 힌트가 될 부분을 옮겨둔다. 물론 박솔뫼가 동면이란 이런거야 이런 걸 거야 어디 따로 정리해두고 그로부터 연작을 써내려갔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때그때..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썼을 거라고 믿지만. 동시에 시온과 태인과 태식의 셋이 결국 함께 만나지 못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동면에 든 사람들 꿈을 꾸는 사람들을 지켜주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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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개는 시간과 마음의 연결이 약해진 사람들에게 나타나 산책을 요구한다. (88)

 

사람들은 걸으며 신앙에 대해, 훼손되고 흔들리기 쉬운 믿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흔들리면서도, 훼손된 부분을 문지르고 씻기면서 그것을 회복하려 애쓰며 지나간다. (91)

 

너희는...... 사람을 과현 구할 수 있겠니? 밥을 먹고 신나고 노는 것만 아는데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나......? 물론 그럴 필요는 없지만...... (93)

 

시온은 종종 태식의 존재를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 개의 존재처럼 어느 순간 나타나 뚜렷하게 머물다 사라졌다. 물론 그림자 개보다 자주 나타나는 일이었고 이런 순간이 다른 이들에게도 일어나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존재가 뚜렷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무척 평범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왜 그것이 무척 사랑했던 사람이거나 오래 함께한 사람이 아니라 태식인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시온은 종종 태식을 볼 수 있었고 선명하게 그를 느낄 수 있었다. (95)

 

그림자 개를 따라 걸으며 태식은 어딘가 먼 곳에 개가 있고 그 개가 반사되어 그림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원리로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극장 좌석에 앉으면 머리 뒤에서 무언가 어둠과 빛의 알 수 없는 움직임과 효과로 촬영된 필름은 돌아가고 어둠 속 스크린으로 영화가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 한 걸음 뒤에 개가 있고 태식은 그 개를 볼 수 없지만 개와 태식 사이 스크린이 있고 영화처럼 그 개가 만들어낸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물론 괜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태식의 짐작처럼 개가 있지는 않았다. 아니면 누군가의 그림자놀이일지도 모른다. 가로등 뒤 두 손을 모으고 개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몸통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러기에 그림자 개는 너무나 개였고 태식은 이 개를 개로 받아들이면서도 먼 곳에 아주 먼 곳에 실제 개가 이처럼 자신과 걷고 있을 것이라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보는 것은 영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96-97)

 

개와 태식은 아무도 없는 운동장 안에서 개와 사람 그리고 목줄이 만들어내는 조금 귀여운 그림자가 되어 한참을 걸었다. (97)

 

태식은 그림자로 된 목줄을 당겼지만 개는 골목 초입을 향해 맹렬히 짖었다. 오른손으로는 목줄을 잡고 왼손은 벽을 짚고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을 때 태식이 본 것은 긴 그림자를 한 어떤 존재였다. 얼마나 큰 존재인지 그림자만으로는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무척 길고 큰 존재임이 분명했다. 긴 망토를 입은 자로 보였는데 그림자의 색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선명한 것이 아니라 탁하게 보였다. (98)

 

탁한 그림자의 존재가 있던 담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었고 담을넘어 뻗어 있던 나뭇가지들은 새카맣게 타 있었다. (...) 태식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황당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본 것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 그림자뿐이었지만 우리가 본 것이 바로 그것이었고 우리에게 나타나 펼쳐진 것이 바로 그림자였다.(99)

 

한참을 걸었을 때 시온은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익숙한 발소리도 다정하게 앓듯이 내는 끙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불빛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을 때도 두부와 두두가 없다면 너무나 서글플 것 같아 다리 아래 어둠 속에서 조금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서 있었다. (100)

 

우리가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두부와 두두는 성당에 있으면서 시온을 찾아온 것이라는 것을 시온은 잘 알고 있었다. (101)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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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파리에 가게 된 건 팔 할이 이상우 덕분(또는 탓)이다. 플라뇌르의 기원을 탐색하고 재발명하는 여정은 사실 파리에 안 가도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내가 쓴 대부분의 글이 그렇듯 나는 어딘가에 가지 않았을 때 그곳에 대해 더 잘 안다. 어떤 사람들은 사기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소설가다운 재주라고 하지만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발로 뛰는 경험이라는 관념에 너무 사로잡혀 있다. 북토크에서 이런 질문을 받기도 했다. 작가는 땅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하는데(다시 말해 현실에 기반해야 하는데) 정지돈 작가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나요?

  무척 호의적인 질문이었지만 난감했다. 난감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땅에 발을 딛고 있다! 물론 종종 누워서 글을 쓰고 그때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지만......(내가 아는 한 누워서 글을 쓰는 또다른 작가는 정영문이다. 나는 그런 사실에 착안해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글쓰기 클래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앉아 쓰기, 누워 쓰기, 서서 쓰기').

  경험은 상상력을 제한한다. 노문학자인 김수환 선생은 내게 여행이나 실제 경험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진짜로 중요하고 흥미로운 건 이상으로 상정한 1세계의 현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상한 유토피아에 실제로 작용했던 (그들이 머릿속에서 상상해낸) 저곳의 상상계이기 때문이에요." 동시대가 흥미롭지 않은 건 모든 게 개방되고 평평해져버렸기 때문이다(또는 그렇게 착각하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여행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으며 그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세상. 그리고 그걸 산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그런 면에서 지돈 씨는 실제 경험이 아닌 텍스트를 모종의 현실로 치환해서 그 격차를 극화하기 때문에 흥미롭다는 식의 이야기였는데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의도했던 바로 그것이었지만 동시에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여행을 가면 안 되는 걸까? 경험을 하면 오히려 얄팍해지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정지돈, 55-56)

 

  "(...) 나 역시 불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뒤라스의 단편영화를 본다. 아주 가끔 몇 단어를 알아듣고 궁금한 부분은 유튜브의 자동번역 기능을 빌린다. 영어로 번역된 대본 전체를 구글에서 찾ㅇ르 수도 있다. 그러나 뒤라스가 부여한 의미를 알기 전과 후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면 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의미를 알고 나면 시시해진다는 얘기가 아니다. 명확하지 않고 다소 미적지근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전이 더 좋은 이유는 단지 시간과 순서의 문제일 뿐이다.(그리고 가끔은 이것이 문제의 전부이기도 하다). 작품이나 사태를 파악할 때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그래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속박한다. 다른 쪽에서는 그런 강박은 버리고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면 된다는 생각, 그래서 아주 엉터리로 내용을 해석하거나 나이브한 이해에서 멈추지 않게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한다. 책을 끝까지 보지 않고 이야기하면 안 돼 또는 괜찮아, 영화의 장면이 어떤 작품의 오마주인지 알아야 해 또는 상관없어, 지젝을 이해하려면 라캉을 봐야 하고 들뢰즈를 이해하려면 스피노자를 봐야 되고 결국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 구약과 신약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어떤 사람은 플라톤을 원문으로 봤고 원문에는 사실...... 등등. 전자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만들기 때문에 문제적이고(모든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후자는 무성의함, 불확실한 태도, 자기변명, 반지성적인 유행을 묵인하기에 문제적이다. 당신이 만약 작품 또는 사태에 반응하고 그 순간의 맥락에서 충실하게 접근했다면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 다만 충실도를 판단하는 것이 어렵고(이것 역시 불가능에 근접한다)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 뿐이다."(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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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타가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는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태도, 숨김이나 꾸밈이 없고 투명하며 생각과 행동 사이에 덜그덕거림이 없는 태도가 메타적 사고에서는 불가능하다.

   메타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좋게 해석하면 자기반성이다. 좀 더 느끼한 단어로 얘기하면 성찰이다. 그러나 실상 메타적 사고는 이러한 자기반성과 성찰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메타는 불가능성을 다루는 사고다. 메타적 태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는 기만과 반성, 변형과 생성의 폐쇄회로를 빙글빙글 돈다.

   이는 물론 자기준거적인 태도로서의 메타성에 대한 것이다. 흔하다 못해 지루한 것이 되어버린 메타픽션, 메타서사의 측면에서 보면 메타는 단순한 문제다. 해당 장르의 문제를 해당 장르의 작품이나 형식을 통해 재사유하기 -> 진실과 소통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 나는 이런 식의 정의나 방식에 관심이 없는데 그것은 이와 같은 태도가 메타픽션과 픽션을 구분짓기 때문이다. "메타"가 아닌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듯이(게다가 메타픽션과 픽션의 구분은 구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동일한 인간주의적인 결론에 이른다는 면에서 기만적이다).

   내 관점은 이렇다. 메타는 존재의 근본 속성이다. 모든 것은 메타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픽션은 메타픽션이다. 모든 사람은 "부자연"스럽다. 문제는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느냐 그냥 없는 셈 치고 사느냐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이론은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의 극치다. "한번 커뮤니케이션에 빠져들면 단순한 영혼의 천국으로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소통은 불가능하며 단지 소통이 소통할 뿐이다. 의식은 공유될 수 없고 개인은 자신의 체계 안에서 맴돈다.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의사교환 과정은 사회적으로 약속된 특정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수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제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선 일련의 과정 모두에 메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

 

   메타가 지긋지긋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래서다. 메타적 전개는 무엇을 대상으로 삼든 대상으로 삼은 대상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 자아를 대상으로 삼든, 장르를 대상으로 삼든, 매체를 대상으로 삼든. 그러나 다시 돌아가 메타를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한다면, 메타적 방식을 통해 근본적인 입자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정이 떨어지더라도 말이다."(정지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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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의 말>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이다가 나란히 누워 함께 동면하던 사람들을 그려보았다. 나와 손을 잡고 동면을 하던 사람들 메마른 입술을 하고 있던 사람들. 어느날에는 지금의 나처럼 작은 방에 혼자 누워 있기도 했고 다람쥐와 다른 작은 동물들이 함께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 잘되지 않는 사람들 잠을 자면 오랜 시간 해야 할 말들이 자기들끼리 흩어져 스스로 산속에 가 묻히게 될 것이다. 몸을 일으켜 베개를 안은 채로 <CSI>를 다시 보고 왜인지 늦여름의 부산은 아주 많은 여러번의 수만큼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누군가는 늦여름 부산 호텔 침대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나를 보고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며 잠을 자고 가끔 여름을 생각하고 그러다 가끔 나를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다 말았다. 그렇게 또 잠이 드는 것이다.

 

<농구하는 사람>

트랙이 있는 운동장을 걸었다. 나는 걸으면서 오늘 할 일과 내일 할 일들을 생각했다. 걷다보니 불이 켜졌고 이제 열시가 되었다. 그 방식으로 나는 열시를 알 수 있다. 멀리 큰 시계가 있고 여기가 어딘지를 알면서도 가끔 멀리 있는 남산타워를 보며 이곳을 가늠하고 반대로 남산타워가 보이다니 저게 정말 남산타워란 말이야? 생각한다. 매일 농구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내가 아는 농구하는 사람은 매일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정말로 매일 농구를 하는 어떤 사람을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이름은 고민해보아도 떠오르지 않는 정말로 매일 농구하는 사람의 이름은. 그리고 해변을 뛰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는 자막과 함께하고 흰 개도 자막과 함께하고 말하세요 당신이 백 번 말하게 될 것을. 말하세요 당신이 천 번 말하게 될 것을. 우리는 말하고 우리는 듣습니다. 우리는 만들고 우리는 이해합니다. 걷가가 뛰는 사람들 뛰는 사람들 걷는 사람들 느린 사람들 말하세요. 외치세요. 혹은 주저하세요 주저하면서 자신 없이 말하세요. 나는 폐를 끼치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돕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많이 걸었고 그런 생각들은 씻고 나와 잠자리에 들기 전 떠올랐다. 말하세요 계속 말하세요. 걷다가 어둡고 경사진 골목에서 한 건물만 불빛을 밝히고 있을 때 이런 것만을 계속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가도로와 그 밑을 지나는 택시와 지면과 차의 불빛과 닫힌 건물과 셔터를 내린 가게 안의 종업원과 그 사람의 이름도 생각했다. 어두운 건물 혼자 불을 밝힌 방에서 청소를 하고 또 하는 사람을 생각했다. 그 사람은 어디를 가려고 하고 있다. 어디를 어딘가를 어딘가만을 계속해서 가려고 계획하고 있다. 그 사람은 여기가 어디인지를 너무나 정확히 알아서 어딘가만을 계속해서 계획한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말하고 그것을 나는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이 분명한 것이 되어 남는다. 나는 그곳에서 눕고 잠을 자고 일어나고 걸었다. 끝으로 인사를 해본다면 안녕 잘 자. 나도 자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펄럭이는 종이 스기마쓰 성서>

우리는 한시간도 채 못되어 일어나 지나가다 본 까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생각하는 것과 하는 것은 달라. 마리아는 힘들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있고 그런데 힘이 들고라고 말하며 웃었다. 습관처럼 머리를 넘기는데 상한 머리카락이 잘 다듬어져 손가락 사이로 기분좋게 빠져나갔다. 나는 너를 좋아해 네가 정말 잘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손을 붙잡고 말하고 헤어졌다. 호텔로 다시 돌아와서는 다음번에는 누구를 만날 일이 없어도 별 계획이 없어도 편한 옷을 챙겨야 할까봐 생각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는 꿈을 너무 믿는 것 같아, 꿈이 나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어디선가 동아줄처럼 내 눈앞으로 뭔가가 내려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고. 그래도 잠을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사람이 되기는 하지, 포장된 새 소시지를 뜯는 것 같은 새로움. 여전히 잠과 꿈에 대한 믿음을 그대로 가진 채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고 바를 것을 바르고 입을 것을 입고 침대로 향했다. 나는 얼른 자고 싶었고 그래서 굿나잇 잠이 든다.

 

<매일 산책 연습>

최명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다시 잠을 자려 침대에 누웠다.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 눈을 감고 길을 걷는 생각을 했고 이것을 가상 산책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날도 눈을 감고 산책을 했다. 중앙동을 걷다가 남포동에 진입할 즈음 멀리서 대교와 바다가 보이고 나는 오른편에 있는 부산데파트에 이르고 거주민처럼 터덜터덜 문을 열고 들어간다. 계단은 미문화원처럼 오래된 계단 오래되고 잘 닦인 계단을 올라 복도를 지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래층과 대각선 아래층이 보이고 가끔 집 앞의 화분과 복도에 널어놓은 이불이 보이고 열쇠로 문을 열어 대부분 번호 키로 바뀌었지만 내가 여는 집은 여전히 열쇠를 사용하여 그 열쇠로 문을 열어 손잡이를 열고 방문을 열고 언젠가 내가 살았던 집 같은 공간의 구조를 그려본다. 초여름의 오후이고 창에서 들어오는 햇볓 아래 나는 누워 있고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에 내가 살고 있고 나는 그 옆에 정답게 눕는다. 그러면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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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네틱스가 기계와 인간, 유기체와 비유기체의 정보교환을 다룬다면 기후학은 날씨를 정보로 변환한 뒤 자연과 인간의 정보교환을 다룬다. 정보화된 날씨/기후를 자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린다 체르베니는 비가 주말에만 온다는 사실에 열이 받아 통계 기후학자인 밥 볼링과 함께 연구에 차굿했다. 정말 주말에 비가 더 올까?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24시간이나 일주일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임의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개념이 자연에 있을 리 없고 그렇기에 주말에 비가 온다라는 질문이 맞을 리 없다. 그러나 랜디와 밥은 아무래 생각해도 주말에 비가 더 많이 온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연구를 진행했고 기상위성인 TIROS-N으로부터 1979년에서 1995년까지 대서양 해안 지역의 강우 기록을 찾아내 분석했는데 그 결과 토요일의 강우량이 월요일의 강우량보다 평균 22퍼센트가 더 많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고루 분포되어야 할 확률이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우연일까. 그들은 다시 조사했고 주말 강우량이 더 높은 이유는 도시 환경오염에 따른 기상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도시의 대기오염 수치는 주말로 갈수록 높아지고 주초에는 낮아지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일요일 효과(Sunday Effect)라고 부른다. 인위적으로 시간을 나눈 관찰자 인간의 행위가 자연에 영향을 주었고 인위성은 자연현상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위적인 것과 인위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구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위적이었다는 사실, 자연과 우리의 기계가 하나의 시스템 속에 있으며 우리가 만든 환경은 일종의 제어로 시스템 속에서 서로를 구성한다. 기후학은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정지돈,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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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 예측 말이에요. 좋은 첩보는 문학과 같아요. 탁월한 문학 작품은 미래를 예측한다죠.

   미아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되물었던 것 같다. 문학과 첩보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인정할 건 인정하죠. 그들이 실제 했던 건 환경보호 운동 정도였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한국에 이런 속담이 있죠. 파리도 쓸개가 있다. 미국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어요. 지렁이와 파리들은 밟으면 밟을수록 과격해지고 있어요. 지금은 G7, 다보스포럼 같은 국제 행사들을 방해하거나 각국에 파견돼 과격한 시민운동을 선동한다니까요. 간도 크죠. 얼마 전에는 UN 본부에 폭탄 테러를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어요.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이래서 조짐이 중요합니다. 징후가 중요합니다. 작운 균열이 있을 때 예방해야 하죠.

   일부의 경우를 확대 해석하는 거 아닙니까? 추측과 예견만으로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범죄자로 모는 겁니까? 국가주의 사회랑 뭐가 다릅니까? 파시즘이랑 뭐가 다릅니까? 당신이 그렇게 경멸하는 공산주의 감시 체제랑 뭐가 다릅니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배울 건 배워야 합니다. 언제까지 적이라고 배척만 할 겁니까? 그건 발전하지 않으려는 태도죠. 공산주의 감시 체제에는 상상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찬란한 인류의 문화유산이죠. 이건 비밀인데 프리즘 프로젝트가 바로 공산주의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겁니다. 인권 운운하며 칭얼거리는 건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인권이 뭐 대수인가요? 징후를 예측해서 안전을 꾀하고 범죄를 방지하면 좋은 거 아닌가요?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 말이죠. 그게 곧 인권 아닐까요? 이미 일본에서는 범죄를 모의만 해도 체포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됐어요. 다른 나라에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죠. 세계적인 추세예요. 그렇게 해서라도 막아야 되지 않겠어요? 아마 자급자족단의 작전이 성공하면 이 아름다운 한국도 사라질지 몰라요. 당신은 조국을 빼앗기고 싶어요?

(...) 

부디 자급자족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발전을 멈추면 모든 게 사라집니다. 청동기와 철기로 돌아가고 싶어요? 맹수한테 잡아먹히고 싶어요? 옷도 없이 벌벌 떨고 싶어요? 모르긴 몰라도 우리 옆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도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을 겁니다."(오한기, <<나는 자급자족한다>>, 1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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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핀은 숙소에서 연락이 왔다는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뭔가요 묻는다. 직원은 엽서를 한 장 건네준다. 델핀은 스페인에서 온 엽서를 들고 방으로 올라간다.

   -델핀, 휴가는 어떠니?

   나에게는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어. 괴로운 일들도 있었지만 그게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어. 하지만 마음이 역시나 혼란스러워. 기다리던 것은 찾았니? 아직 많은 것이 남아 있어.


   해미는 커다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뭔가 씩씩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고 나와 미래는 해미야 힘내 왠지 웃기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지하철역까지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 마신 컵들을 정리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모두가 앉았던 자리에는 둥글게 들어간 얇게 파인 공간이 있었다. 거기엔 어떤 작은 것들이 누워 있는 거지? 그리고 우리의 다리 사이로는 어떤 것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뛰어다니는 거지? 혹은 의자 뒤에 숨어 있는 것들은?

   나와 미래는 극장을 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드물게 날씨가 좋은 날이었고 그래서인지 선명하게 노을이 보였다. 뿌옇지 않고 선명한 청색의 하늘과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붉은색이 만나고 있었다. 여름은 삼십 미터 앞에 있지 않고 나란히 걸어가고 있어. 나란히는 아닌가, 세 걸음 정도의 간격으로 걸어가고 있어.

   "영화 어땠어? 좋았어?"

   "음. 좋았지. 뭔가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우리는 반걸음쯤 사이를 두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우리와 여름은 반걸음보다는 약간 더 멀지만 이름을 가볍게 부를 수 있는 거리를 두고 걷고 있다. 나도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느낌 여름보다 멀리서 무언가 반갑게 인사할 것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역에 도착해 미래는 먼저 지하철을 타러 가고 나는 좀더 걷겠다고 하고 손을 흔들었다. 남아있는 것들과 함께 걸으며." (박솔뫼, <차가운 여름의 길>, <<사랑하는 개>>)




//  나는 그동안 후장사실주의자들이 왜 서로의 책에 서로 해설을 써주는가 왜 이들은 자신들의 폐쇄성을 이런 식으로 전시하는가 좀 궁금할 법도 하지 않아? 저자로서 동시에 독자로서 평론가란 작자들이 어떻게 이걸 해설하려고 들는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책을 읽고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권말에 금정연은 교정지를 받아든 자신이 소설을 읽은 세 가지 방식에 대해 기술하는데 이는 각각 1)쳐다보기 2)읽기(메모) 3)읽기(침대에 누워서)로, 각각의 내용을 요약하면 1) 개+박솔뫼=사랑스러운 소설. (Q.E.D.) 2) "비평으로 나아가지 않고 비평 이전에 멈추는 것을 선호한다는 바르트의 말" 3) 사랑하는 개를 사랑하며 (박솔뫼의 소설을) 읽는 것이다. 숫자가 3이라니 (바르트를 인용하는 금정연의 의도에서) 뭔가 냄새가 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종류의 구린내...는 금정연의 모든 글에서 느껴지는 것이고 나는 반쯤 포기했고 나머지 반에는 정이 들 것만 같다. 어쨌든 그의 문제의식만큼은 잘 알겠다 그가 힘겹게 덕지덕지 쓴 메모들이 하나의 글이 되지 않은 이유란, 그가 "읽기 전부터 <<사랑하는 개>>가 사랑스러운 소설이라는 것을"(144)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것은 <<문학의 기쁨>>에서 정지돈과 금정연이 김태용의 <<벌거숭이들>>을 두고 나눈 일련의 대화다.


   "김태용의 소설이 갖는 일반적인 오해나 편견이 있다.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난해/난삽한 말장난, 문학이 아닌 망상이라는 거다. 조효원의 해설은 이에 대해 반박하며 김태용의 소설을 그렇게 읽는 자들을 기각한다. 그는 김태용의 "리듬-연상의 복잡계"가 "문학의 영토"를 떠난 "허무로 수렴될 것만 같은 절대적인 유언"이며 이는 "음악 이전 혹은 직전"의 "한계 영역"으로 돌입한다고 말한다(무슨 말인지.......)

   우리는 조효원의 이런 이야기들이 그가 기각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만 동일한 양상의 오해를 조장한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김태용의 소설은 서사를 해체한 난공불락의 성,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불가능의 영역으로 돌입하는, 블랙홀로 진입하는 인듀어런스호 같은 소설이라는 인식을 다시 한 번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했다.


(...)


   3부도 할까. 금정연 씨가 말했지만 우리는 이런 분석은 멈추기로 했다. 우리가 이렇게 김태용의 작품을 분석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소설에서 연상과 말장난을 거둬내면 의도와 계산이 곳곳에 숨어 있고 이는 무의미한 말장난, 툭 튀어나오는 연상과 화음을 이루며 손쉽게 기각되었던 재미나 의미를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태용의 소설이 흔한 편견이나 수사처럼 대단히 난해하거나 심연스럽고 불가능한 무언가가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텍스트의 조각 속에서 드러나는 내용은 생각보다 평범하고 보편적이기까지 하지 않나. 그냥 한 번 읽고 두 번 읽으면 된다. 힝요오에 웃고 마라롱을 귀여워할 수도 있다. 불가능하지 않다. 가능하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불가능'은 같은 글에서 언급된 바 '불가능을 가장한 아카데미즘'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무슨 말인가? 이들의 판단에 김태용의 소설은 '가능한' 것인데 조효원의 해설은 그것을 '불가능의 영역'으로 밀어넣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그것이 작품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평론의 경직성 때문이라고 본다. 건축방식이 다른 작품, 일면으로 전체가 파악되지 않는 작품을 어떻게든 조감하기 위해서 위로만 위로만 올라가다 보면 숨이 탁 막히는 지점이 등장하는 것이다. 산소가 희박한 공간에서 뱉어지는 말들이 뭐냐면 바로 불가능한 말이다. 이때 평론의 작품에 대한 선의는 어떤 교조성으로서 발현하고 만다. 이것은... 전위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의 막장 같은 것이 아닌가. 땅 속 어디서까지 버틸 수 있나 스스로를 시험해보는 굴착 작업이 아닌가. 오해가 오해를 낳는 상황을 타파하려면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다분히 옳은,

   말이다만 그게 무엇인가... 박솔뫼의 소설을 세 번에 걸쳐 읽기? "박솔뫼의 소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혼란에 대처하는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들을, 그 나름의 길을 가는 이야기들을,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말들을 정확하게 받아들이기. 섣불리 정리하거나 넘겨짚거나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고 혼란을 (잠시만이라도) 혼란으로 두기. (박솔뫼의 모든 화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세계 속에서 주인공도 희생자도 관찰자나 방관자도 되지 않고 세계와 함께 있기."(140-141)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혼란을 혼란으로 두기, 라는 말이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정리해서 인과율과 개연성과 기승전결 속에 욱여넣지 않기. '길을 가다 사람들을 만나 기뻤고 빵을 주니 빵을 먹어서 좋았다'고 말하기. 그러나 길을 가다 만난 사람의 의미와 그들이 먹은 빵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들은 대문자 역사의 일부가 되어 (비로소) 죽게 되는 것이다. 금정연의 글은 그것을 피하고 있다. (김태용처럼) 세 번 말하는 대신 세 번 읽기를 실천하면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사랑, 운운하는 것으로 문장을 추동하고 글을 빠져나가는 것은 너무 기름지고 미끄러운 방식이라 어떤 지점에서는 도무지 입에도 대고 싶지 않아진다. 비위가 강한 것은 좋은 음식을 만들고 먹을 줄 아는 것과는 거의 별개의 문제인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좋을, 필요도 없다는 걸까? 좀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랑도 좋지만 연대를, 거기서 발하는 어떤 서늘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박솔뫼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음... 나는 한 번 완독하고 아연해져서 책장 깊숙히 모셔둔 머리부터 천천히로 돌아가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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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작품과 삶은 일종의 피드백 작용처럼 계속해서 루핑되는 관계니까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품과 삶은 맞물려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책은 사람이나 실제 사건처럼 당연히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 관계를 같이 보는 것에 흥미가 있어요. 레이어가 늘 여러 겹으로 놓여 있기 때문에 그걸 중층적이고 복합적으로 다룰 때 더 흥미롭고 재밌어집니다. 그런데 작가와 텍스트의 관계를 분리되었냐 아니냐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물론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어떤 예술 장르라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행동과 사회 사이의 영향 관계가 중요합니다. (...) 저는 실제 삶 역시 픽션이라고 생각합니다. 픽션이 삶을 지탱하지 않으면 삶 자체가 진행이 안 되지 않나요. 실제 삶에서 픽션을 빼면 인간은 언어 이전의 동물인 겁니다."


"요즘 들어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당연한 걸 몰랐던 겁니다. 그것 역시 언어적인 문제일 수 있는데, 언어를 사용하면 구분과 분리가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를테면 세계는 이미 픽션으로 이뤄져 있고, 우리가 픽션의 영향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렇지 않고 사실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생각 역시 언어의 한계와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끊임없는 피드백 작용, '그걸 더 적극적으로 내가 하는 예술에서 드러내는 게 맞고, 더 좋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그걸 어떤 정치적인 지점이라든가 예술사적인 지점에서의 의의와 연결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연결을 직접적으로 시키게 되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깊이의 차원에서 재현이나 인용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 인용은 재현의 배치를 바꾼 재현이다. 그런 면에서 재현 역시 인용의 배치를 바꾼 인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현이라는 게 결국은 세계를 인용하는 거고, 세계의 어떤 인물을 인용하는 거고, 자기의 어떤 상상을 인용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사회에서, 문학으로 치면, 재현의 익숙한 형식이 있어요. 재현적인 형식이 있고, 인용은 인용의 형식이 있어요. 그런데 재현도 인용의 형식으로 쓸 수 있고, 인용도 재현의 형식으로 쓸 수 있습니다. 그 형식 배치를 다르게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또 다르게 감각하잖아요. 그러니까 인용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은 재현의 특정한 형식에 매몰된 결과라고 봅니다. 가령 인용은 저자의 권위에 기댄다거나, 원래 있던 말을 반복한다든가,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창조가 아니라든가. 여기엔 이분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현은 진짜 창조 내면에서 오는 좋은 거고, 인용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개의 배치를 바꾸는 짓을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건 진실 여부가 아니라 효과입니다. 물론 효과만 있으면 어떤 거짓이라고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냉정하게 얘기하자는 거죠. 실제로 효과만 있으면 그게 거짓이라도 기능을 하잖아요. 꼭 그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빌렘 플루서적인 디지털 가상 세계까지 안 가더라도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부정적인 케이스지만 트럼프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위험한 이야기지만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팩트나 진실에 집착하는 태도, 그걸 규명하려는 시도도 사실은 효과를 산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그래서 소설가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저한테는 소설가라는 직함이 배치를 다르게 할 수 있는 요인을 주는 직함인 거지, 거기에 따라서 뭔가를 해야 된다라는 의무 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상한 것 같아요. "저는 글 쓰는 사람" 막 이렇게 자기와의 약속,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는 프로작가의 의식은 이런 거죠. 만 원을 주고 샀으면, 만 원을 주고 산 만큼의 재미를 드리고... 그게 즐거운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나오는 글만큼 재미없는 글이 없죠. 그렇습니다. 소설가라는 건 저에게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정지돈 x 강동호,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문학과사회>> 2017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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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텍스트는 인용 표시 없는 인용이다" 혹은 "모든 문학은 표절이다"라는 주장에 담긴 의미는 텍스트의 발생학적 기원을 실증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규명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텍스트와 관련하여 인용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순수한 창작'이라는 신화가 지니고 있는 허구성을 비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모든 쓰기-읽기 행위가 처해 있는 유한성을 인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유한성을 어떤 대화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 조건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나는 이해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텍스트는 실체가 아니라, 쓰기와 읽기라는 행위가 동시에 참여하는 어떤 활동의 장을 가리키며, 인용은 그 활동의 역사성을 증언하는 개념일 수 있다. 텍스트에 있어서의 역사성이라는 지평은 크라카우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의 세계와 대책 없는 주관주의적 심리주의 사이의 영역, 즉 '중간계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 중간의 영역은 역사의 영역이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것을 바르트는 더할 나위 없이 간명하게 표현하다. "텍스트를 쓰는 나는 종이 위에 씌어진 나일 뿐이다." 텍스트 바깥의 나, '의도의 심연'을 간직하고 있는 초월적 나라는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비역사적이고, 더 나아가 비정치적이다. 이것을 사실 명제이자 선언이면서, 동시에 텍스트 바깥을 도피처로 삼으려는 모든 보수주의적 태도에 대한 정치적 비판으로 읽을 수는 없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바르트의 테제는 다음과 같이 변주되어 인용될 수 있늘 것이다. "텍스트를 인용하는 나는 텍스트로 인용되는 나일 뿐이다." 이른바 '인용으로서의 텍스트'는 읽기-쓰기, 쓰기-읽기의 구분 불가능성과 동시성을 증언하고, 그 사이를 적극적으로 매개하는 실천적 개념에 가깝다."


"반면 브르통으로부터 '신경쇠약자', '똥-철학자excrement-philoshopher'라고 경멸당했던 바타유는 일찍부터 초현실주의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브르통을 따르는 초현실주의자들은 '치기 어린 희생자'의 포즈를 벗지 못한, 일종의 소영웅주의적 엘리트주의자들에 불과했다. 바타유가 피력한 여러 감정적인 비난들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들의 제스처가 주류 상징 질서로부터 승인받기 위한 '오이디푸스적 분탕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들이 그토록 부정하던 자본주의의 오이디푸스적 승화에 유혹되기 쉽다는 지적이었다. 바타유의 저주에 가까운 비판은 오래 지나지 않아 사실로 드러났는데, 초현실주의의 실패는 그들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보드리야르에 의해 극적으로 선언되기에 이른다. "'현실이 허구보다 낯설다'라는 초현실주의자들의 경우, 삶의 미학화에 대한 경구는 이미 유효하지 않다. 더 이상 삶이 마주할 수 있는 허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이미 현실의 유희, 급진적 탈마법화에 의해 끝나 버렸다."(<<상징적 교환과 죽음>>) 브르통의 말대로 진정한 삶은 다른 곳에 있다. 그러나, 다른 곳은 없다."


"벤야민에게 인용이 중단이라면, 상황주의자들에게 인용은 상황의 전면적인 재구축이다. 이들은 "이념은 표절 속에서 진보한다"라는 로트레아몽의 말을 전면에 내세우고, 전용detournement이라는 전략적 개념을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이른바 이념의 전용을 통해 역사적으로 오염된 이념을 새롭고도 정확한 이념으로 수리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된 아이디어이다. 때문에 이들에게 오해와 오독은 필수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니, "상황주의는 '오해의 정당성legitimacy of misinterpretation'을 구축한다"는 무스타파 카야티의 말처럼 인용에 동반되는 오해와 오독이야말로 새로운 혁명적 상황을 구축하기 위한 적극적인 기술의 일환이다. "상황의 구축은 연극에 대한 이념의 근대적 몰락의 반대편에서 시작한다. 연극의 주요 원리(비개입)가 어떻게 낡은 세계에서의 소외와 관련 있는지를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가장 혁명적인 문화적 실험들은 배우에 대한 관객들의 심리학적 동일시를 끊어버리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자신의 삶을 혁명적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고취시킴으로써 상황에 참여시킨다. (......) 그렇게 더이상 평범한 배우로 불릴 수 없는 새로운 의미의 배우들,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인간들livers이 늘어날 것이다."(기 드보르. <상황의 구축에 관한 보고서>)"(강동호, <인용-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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