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시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먼저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에 주목해보기로 한다.


  모든 위대한 시인은 오직 단 하나의 유일한 시로부터 시를 짓는다. 그가 어느 정도로 이 유리한 시에 내맡겨져, 그 속에서 어느 정도로 시짓는 말함을 담을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위대함이 가늠된다. 한 시인의 시는 말해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GA12, 33)


  인용문에 따르면, 말해지지 않은 하나의 시, 영원히 침묵하는 시 한 편 때문에 시인은 무수히 많은 시를 짓는다. 손에 잡힐 듯, 언어로 포착될 듯하면서 이내 잡히지 않는 그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시인은 습작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무수한 작품을 남긴다. 말해지는 순간 습작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시들의 운명. 이 경우 습작이란 상식적인 의미의 불완전한 시를 뜻하지 않는다. '불완전'이라는 말은 '완전'을 전제한다. 완전한 이상을 전제해야 불완전한 작품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용문의 유일한 시는 과거 고전주의자들이 말했던 작품의 이상을 뜻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상은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없든 간에, 작품 존재의 완전성을 뜻하는 말인 데 반해서, "말해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유일한 시는 쓰여지는 순간 '아님'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시이기 때문이다. 이 유일한 시는 마치 삶의 배후에서 생명을 불어넣는 죽음처럼 한 작가로 하여금 수많은 작품을 창작하게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결코 언표될 수도 포착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작품이다.

만일 어떤 시인이 유일한 시를 짓는 데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불가능한 일을 기적적으로 실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결과는 어떠할까? 그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은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 시인은 작품을 통해서만 비로소 시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일한 시를 언표하는 순간,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오직 "한 시인의 시가 말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야만, 즉 언표 불가능성이 불가능성으로 간직될 떄에만, 시인은 작품을 쓸 수 있고 시인으로서 남을 수 있다.

  죽음을 "불가능의 가능성"이라고 했듯이, 유일한 시는 여타의 시들을 가능케 해주지만, 동시에 그 자신은 철저히 불가능한 작품이다. 이 불가능성에 얼마나 간절히 내맡겼느냐에 따라 실제 창작된 시의 위대함이 가늠된다. 죽음의 선구를 통해 삶에 변화 가능성이 생겼듯이, 불가능한 작품은 무수한 작품의 창작 가능성을 확보해준다. 그 불가능성을 회피하지 말고 정직하게 응시하고 떠맡을 때, 그것에 자기를 온전히 내맡길 때, 작품에는 이전에 볼 수 없는 심연의 깊이가 가능해지며, 그 깊이가 작품의 위대함을 조성한다. 이런 상황은 시 창작에서뿐만 아니라 시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들은 '시적이지 않은 언어들'의 소음 속에 있다. 그것은 마치 가벼이 내려앉은 눈발로 인해 제 곡조를 내지 못하는, 허공에 자유로이 걸려 있는 종鍾과 같다. ......아마도 시들에 대한 모든 해명은 종에 떨어지는 눈일 것이다.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어떤 해명이 할 수 있는 것과 할수 없는 것에 대해 언제나 다음의 사실이 유효하다. 즉 시 속에 순수하게 지어진 것이 좀더 분명해지기 위해서는 해명하는 말 자체와 그렇게 말하려는 시도가 매번 부서져야만 한다. 시로 지어진 것으로 말미암아 시에 대한 해명은 그 자신을 쓸모없게 만들려고 해야만 한다. 모든 해석의 마지막 발걸음이자 가장 어려운 발걸음은 시의 순소한 존립 앞에서 해석의 해명들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데 있다.(GA4, 6-7)


  종국에는 시 앞에서 매번 부서지고 쓸모없게 되어버릴 해석의 운명. 인용문에 따르면, 해석은 사라짐을, 죽음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다. 시 작품에 무한히 접근하려 하지만, 작품과의 행복한 합일은 해석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불가능성 덕분에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해석이 작품과 일치한다면, 다시 말해서 일치 불가능성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면, 더이상 해석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작품과의 일치 불가능성이 해석의 전제조건이다. 그리하여 모든 해석들이 매번 부서지고 사라지고 죽어야만 해석은 하나의 해석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해석 불가능성ㅇ르 가능하게 해주어야만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위의 책, 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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