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하나의 문학의 정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정치는 최소한 이중적이다. 19세기의 보수주의적 비평가들과 21세기의 진보적 비평가들이 새로운 문학에 대해 공히 질책하는 "화석화"에는 사실 두 개의 논리가 교착되어 있다. 한편으로 화석화는 사회적 위계의 표상들에 부여했던 차이 체제의 붕괴를 나타낸다. 화석화는 주인이나 목적지 없이 모든 주제들의 동등성과 모든 표현의 사용 가능성이라는 대법칙인 민주주의적 글쓰기의 논리를 완성한다. 능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어느 낱말들, 문장들 또는 이야기들을 취하면서 절대화된 문체의 도움으로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화석화는 글쓰기의 민주주의에 낱말들의 의미와 사물들의 가시성 간의 또다른 일치 규칙들을 발명하는 새로운 시학을 대립시킨다. 화석화는 이 시학을 정치와 동일시한다. 또는 만일 정치의 무대들과 언표들을 그 토대의 역할을 할 "진정한 무대"의 규칙들로 대체하는 것을 메타 정치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면, 화석화는 어쩌면 이 시학을 하나의 정치, 아니 오히려 하나의 메타 정치와 동일하다고 간주한다. 문학은 정치가들에게 민주주의적 무대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도록 하면서 사회의 심층 속으로 여행한다. 문학은 역사학, 사회학, 맑스주의적 프로이트적 학문이 그 유산을 공유할 사회적 신체의 해석학, 진부한 것들의 신체에 대한 세계 법칙들과 보잘것 없는 낱말들의 독해를 발명한다. 과학이 상품 교환의 진부성 아래 감추어진 자본주의적 생산의 지옥을 발견한 반대로, 맑스가 독자에게 이 지옥을 함께 파헤쳐 들어가자고 제안할 때 그가 인용하는 작품은 단테의 <<신곡>>이다. 그러나 그가 수행하는 해석학적 몸짓은 발자크의 <<인간희극>>의 시학에서 차용된다. 상품은 환영이다. 외양상 아주 단순한 상품은 실제로는 신학적인 미묘한 매듭을 지니고 있다. 이 맑스주의적 과학원칙은 이른바 그 합리적인 목적에 의해 통제된다고 믿는 플롯의 논리로부터 외면적 진부성 속에 숨겨 있는 의미작용들의 세계로 우회했던 문학혁명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된다. 이 원칙은 문학혁명의 가장 역설적인 법칙을 차용한다. 어떤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부한 것들을 초감각적이고 환영적인 모습들로 만들어야 하며, 거기에서 사회적 기능의 암호화된 글쓰기가 출현하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 훗날 발터 벤야민이 상품이라는 환영과 파리의 산책 지형학에 입각하여 보들레르의 상상적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맑스의 물신주의 이론에 의존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산책 장소는 파리의 그랑 불르바르보다는 물신주의 이론을 개념화한 발자크, 벤야민에게 직접적으로 영감을 준 루이 아라공의 초현실적 몽상에서 떠나지 않았던 발자크의 동굴-상점이 더 맞을 것이다. 오페라 가와 유행에 뒤쳐진 지팡이 상점 앞을 지나는 아라공의 마법적 산책은 발자크의 갈레리 뒤 부아와 그곳에 있는 상상 밖의 모자들로 가득한 모자 가게들의 환영적인 묘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것은 한 작가에 대한 어떤 작가의 영향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문학으로서 문학에 의해 제시된 시적 및 메타 정치적 모델과 관련이 있으며, 인문 사회과학의 해석방법은 많은 부분에서 이 모델에 빚지고 있다."(<문학의 정치>, 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