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에 유념할만한 출판사들이 하나씩 생긴다는 건 매우 흡족한 일이다. 오늘은 북노마드에서 나온 책들을 쭉 훑어 보았는데, 2년 전에 발행한 무크지 하나가 있어 알라딘 미리보기로 열어보았다.
"아감벤은 다소 뜬금없이 초기 기독교(2~6세기) 교부들의 역사로 돌아가서 그들이 사용했던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 주목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경제economy'의 뿌리말인 '오이코노미아'는 기독교 신학에서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교부들에 의해 처음 전유된다.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세 가지 지위가 여호와라는 유일자로 통합되어 있다는 삼위일체설을 관철하기 위해 교부들은 여호와라는 존재being과 그가 수행하는 일action을 나눈다. 성부인 여호와가 존재 자체라면, 성자인 그리스도는 세상에 대한 일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인간 세상을 통치government하고 관리administration하는 그리스도의 역할('일')을 이르는 단어가 '오이코노미아'이다. 이렇게 이미 2~6세기경 사이에 서양의 철학에서 '존재'는 신학을 경유하여 존재론ontology과 실천론praxis으로 분리되어 이해되기 시작한다. 왜 아감벤이 '오이코노미아'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제 가닥이 잡힌다.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의 '오이코노미아'는 앞의 헤겔-이플리트-푸코가 사용했던 '실증성'과 동일한 역할, 곧 외부(신, 권력)에서 존재(인간, 신민)에게 가해지는, 그래서 그를 가공하고, 변형하고, 통치하고, 관리하는 일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던 단어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는 후에 '디스포지티오dispositio'라는 라틴어로 번역된다. '디스포지티오'는 푸코가 '장치'를 의미하며 사용했던 프랑스어 '디스포지티프dispositif'의 어원이고, 푸코의 '디스포지티프'가 영어로 번역되면서 '아파라투스apparatus'가 된다. 경제oikonomia/economy와 장치dispositio/dispositif/apparatus가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장치와 실증positivite/positivity이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 그래서 결국 경제, 장치, 실증이 모두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요컨대, "장치(경제, 실증)"는 존재를 가공하고 변형하고 관리하고 통치하는 외부적 활동을 의미하는 것, 곧 자연적 '존재being'을 특정한 '주체subject'로 만드는 것이다. 장치는 언제나 주체화의 장치다."(문강형준, <<해시태그 vol.1>>)
아감벤은 작년에 나온 <불과 글>로 처음 접했는데, 이 책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정수는 이쪽에 있겠거니 싶다. 놀라운 건 그게 아니고, 문강형준의 이 글이 어제 부랴부랴 읽었던 강동호의 글과 다분히 연결된다는 것이다. 강동호는 인문사회과학의 '모든 것의 이론'의 가능성과 함께 게리 베커가 제시한 경제학의 '합리적 선택 이론rational choice theory'을 언급한다.
"전통적인 인문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과 사회를 추상적이고도 비역사적인 시선으로 다루는 경제학의 방법론은 그 자체로 문제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비판은 어쩌면 부차적인 수준에 그칠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문제는 경제학의 제국주의적 확산 현상을 단순히 학문적 위상과 영향력을 둘러싼 분과 학문 간의 인정 투쟁 정도로 소박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이론'으로서 경제학적 환원론이 발휘하고 있는 파급력 자체는 좀 더 중대한 진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에서 권력의 작동 원리와 더불어 권력 체제의 정립을 가능케 하는 어떤 결정적인 에피스테메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푸코를 호출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다만, 푸코가 권력의 장 안에 편입된 행위자들의 주체적 선택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경제학의 모델을 통해 얻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들이 경제 영역에서 어떻게 항상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처럼, 경제학적 접근 방식은 환경의 영향, 구조의 제약 속에서 이루어진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 어떻게 사회적 균형equilibrium에 도달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한 매력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다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경제학을 통해 권력의 통제와 자유로운 개인 주체의 행위라는 서로 모순된 상황을 비로소 양립 가능한 것으로, 혹은 합리성을 통해 매개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 즉, 개인은 권력의 장 안에 무기력하게 포섭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는 주체적인 존재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적인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어떤 권력 관계의 탄생 및 유지를 가능케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에 억압된 개인, 주체성을 상실한 개인이라는 고전적이고도 이데올로기적인 억압 이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호모 에코노미쿠스와 근대의 통치성>, <<문학과사회>> 2014년 여름호, 강동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다. 푸코의 장치 개념이 애초 경제와 연관되는 것이었다면, 장치가 언제나 주체화의 장치인 것처럼 주체란 언제나 합리적인 주체인 것이다. 고전적인 지배를 통한 통치는 끝났다. 이제는 "지배를 제한하고 경제적 주체들의 합리적 선택을 가능케 하는 자유"를 통한 통치의 시대다. 물론 이러기 위해서는 합리성의 신화가 동시에 구축되어야 할 터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기도 한데, 통치자들은 예컨대 인터넷 도래 이후로 패를 감출 만한 수단이 없어졌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시장'과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패 자체를 제거하는 방향을 택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푸코는 작금의 통치구조가 작동하는 좌표공간에서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개인과 개인에게 행사되는 권력 사이의 접촉면, 결론적으로 권력이 개인을 조정하는 원리는 바로 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그런 종류의 틀일 뿐인 것입니다. 호모 헤코노미쿠스, 이는 통치와 개인의 경계면인 셈입니다."(푸코)
(...)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통치와 개인의 사이를 매개해주는 가장 명백한 방법론적 지평이자 권력의 정당성이 정립되는 지점인 것이다. 이것은 경제학적 인식론 자체가 어떤 당위 명제도 사실 명제일 수도 없다는 사실, 오히려 수행적 명제에 가깝다는 홍기빈의 지적과 정확하게 공명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경제학적 원리의 정치적 힘이 바로 그 수행성, 즉 이러한 사변적 '방법론' 자체에서 활성화된다. 이러한 수행성의 다른 이름이 푸코의 표현으로 바꾸면 통치실천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학적 분석이 허구라는 비판은 통치의 관점에서는 무용할 수밖에 없다. 푸코가 말하는 진실-진술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식론적인 진리에 다가섰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효과와 기능 그리고 그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강동호)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장치의 극단적 포획와 분할'에 맞서는 '공통화의 역-장치', 곧 '장치의 신성모독화'가 가장 필요한 시점이 된다. 그러나 아감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장치에는 물론이거니와 장치가 행하는 주체화 과정에 끼어들기가 불가능한 한, 그래서 모든 정치의 시작점이자 동시에 소멸점인 '통치되지 않는 자들the Ungovernable'이 출현하지 않는 한"(24) 신성모독화라는 역-장치는 아예 제기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도한 장치와 그것이 가진 영향력 속에서 모든 성찰 능력을 잃은 채로 탈주체화되어버린, 그래서 궁극적으로 장치에 의한 무한 착취를 당하면서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탈주체' 혹은 알랭 바디우 식으로 말하면 "인간-동물human-animal"을 목격한다. '통치되는 자들the Governable'로 넘쳐나는 곳에서 아감벤은 '통치되지 않는 자들'의 출현을 바라지만, 이미 장치-내-존재라는 삶의 조건은 그 출현을 봉쇄했다. 이 완벽한 '피통치자들'은 오늘날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어쩌면 또하나의 호모 사케르는 아닌가. 당연히, 이러한 상황의 결말은 "파국catastrophe"이다(24)."(문강형준)
과연 파국왕이시다. 그러나 '신성모독profanation'이라는 기제에 대해서는 좀 의문인데, 첫째로, 이것이 역-장치라는 이름에 딱 들어맞을 만큼 세속적이고 자유로운지. 신성모독은 다른 신성의 주장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A가 유일하다'고 했을 때, 신성모독은 '신B가 있다(유일하다)'고 하는 일과 '신은 없다'고 하는 일 두 가지 모두를 통해서 가능하다. 전자는 전유에 불과할 것. 말마따나 그 끝이 파국이라면 조금 더 섬세하게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둘째로, 신성모독이 결국 통치체제-정치공동체에서 추방될 것을 각오한 한에서만 가능할진대, 작금의 정치체제는 관계 이전의 생존과 관계된 경제체제와 너무 밀접하지 않나? 그러니까 신성모독의 판돈은 언제나 생명인 것이다. 예를 들어, 선거로 심판하자, 이런 말은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해결이 되어주지는 못 한다. 선거에서의 선택 기준이 언제까지고 '합리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면 말이다. 어쨌든 이 구조적 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논의에서 종교, 문학, 경제, 정치, 종교는 다 이리저리 얽혀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경제-정치의 연결고리와 관련해서는 강동호의 글에 언급된 홍기빈의 저서/역서를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못다 읽은 김항도 읽어야 하고.
또 하나 생각나는 게, 국문과 수업 들을 때 모 교수님이 카프와 비견해서 비판을 받는 구인회의 정치성에 대해 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이야말로 세계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이들이라고 역설하셨었는데, 차라리 이런 식으로 접근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문학의 정치적 가능성은 외려 카프와 같은 단선적인 문제인식-방법론 안에서 만개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니체를 오죽 좋아하시는 분이었는데 니체를 여기 어떻게 끼워넣을 수 있을까? 시도해 볼 거리는 무궁무진하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