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의 도래로 인해) "재생 속도를 늦추거나 정지(또는 화면 캡쳐)하기가 수월해지자, 무빙 이미지의 시간성은 더욱 유연해졌다. 즉 이용자의 여러 개입을 통해 무빙 이미지의 리듬들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영화의 구조와 짜임새, 전체 구성, 그리고 “광학적 무의식”에 대한 전례 없는 통찰을 가능하도록 했다. 당연히 이러한 테크놀로지는 예술가로 하여금 기존의 영화들을 재가공하고,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새로운 작업을 제작하도록 한다 – 물론 때로는 그 결과물이 저작권 문제 해결과 관련한 흥미 정도 밖에는 주지 못한다는 인상을 남기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여전히 대부분 단독 한정판으로 공개되는데, 이 점은 보수적인 미학적/정치적 경제가 가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희소성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데 따른 예측 가능한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로이스에 반대하여, 더 광범위한 비디오/DVD 문화와 비교했을 때, 영화/비디오 설치 작업이 대부분의 싱글 채널 작업처럼 한정판으로 존재하는 방식이 퇴행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상영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미술계는 사본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영화와 비디오를 재아우라(re-auratization)화한다.
많은 예술가들은 견본을 두고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우려를 표한다. 이를 테면 자신의 작업은 갤러리 공간의 특정 조건에서 보여주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물론 이 같은 “적절한” 설치 환경에 대한 욕망이 (성역(聖域) 고유의 제의적 이미지라는 근본적 모델을 여전히 사용하는) 독점권을 통한 미술계의 신비화 경제를 따른다는 사실과 별개로,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업을 제대로 된 환경에서 보여주길 원한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온라인상에서 심각하게 열화된 상태의 무빙이미지를 보는 일에 익숙해진 시대에, 감상자들은 “적절한” 상영 형태를 상상하며 이러한 환경을 “교정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최신 블록버스터의 불안정한 불법 복제본을 노트북으로 본다고 해서 그 영화에게 그다지 해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해당 영화를 최상의 조건에서 보면 훨씬 좋을 것이라는 인식은 영화의 아우라를 증가시킨다.
요컨대 탈아우라화(de-auratization)와 재아우라화의 변증법은 벤야민의 주장보다 훨씬 복잡하다. 영화를 다루는 데 있어 벤야민이 상정한 “올바른” 방식과 “그릇된” 방식 – 영화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론적 가능성을 펼쳐놓거나 축소하도록 하는 – 에 맞추고 싶은 유혹도 있겠지만, 가까운 미래가 가져다줄 문화는 제의가치와 전시가치가 점차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혼성 문화와 같은 형태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가려볼 만한 미세한 차이를 갖고 있는 문화 말이다. 이는 곧 무빙 이미지의 해방을 말하는데, 이 해방은 결과적으로 한정판의 배급 경로와 나란히 작동하는 다른 방식의 배급 회로를 야기한다. 이 같은 경제 안에서 작업에의 접근성은 인맥이나 연고에 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이 된 예술에 대해 과도한 기대는 삼가야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현상은 (벤야민 스타일의 더 “진보적”이 된 대중에 대한 기대는 차치하더라도) 틀림없이 특정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나쁘게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스벤 뤼티켄, 이유니 역, <견본 : 무빙 이미지의 유동성에 대하여>, http://tigersprung.org/?p=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