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앎에 도달하는 글쓰기를 통해 사람은 그 자신과 동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통의 당사자는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곁에 설 수 있는가? 절규하는 자에서 말하는 자로 바뀔 수 있는가? 근대 사회는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훌륭한 도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보편화했다. 바로 글이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통해 사람은 고통받는 타인의 곁뿐만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곁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는 고통의 당사자가 고통의 절대성에 절규하는 당사자의 자리에 머무르며 외로움 때문에 세계를 파괴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했다. 자기 자신의 곁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세계를 구축하게 했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에 '자기의 복수성'을 구축하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에 의해 외부에서 폭파된 세계를 내면에 구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통의 당사자에게 글쓰기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에 대해 해명하고 자기를 납득하는 것이기 떄문이다. 근대적 글쓰기의 탄생이 자서전과 일기에서 비롯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글쓰기가 근대적 주체인 개인, 즉 홀로 있으며 남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었다.
이것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그러려면 이전 여러 저작에서 말했지만 먼저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한 '복수성'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신이나 동물과는 다르다. 신에게는 다른 존재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홀로 충만한 자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관점으로 보면 동물은 먹고살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다른 존재는 '대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먹이는 먹이로서만 가치를 지니고 존재할 뿐이다. 이런 '대상'은 '상대'로서의 의미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사람은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 다른 존재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를 비춰볼 수가 없다. 거울이 없으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신은 이미 스스로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앎에 도달한 자이기에 거울이 필요 없다. 동물은 자기에 대한 앎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무관심하기 떄문에 거울이 필요 없다. 오로지 자기를 알고자 하는 이간에게만 남이라고 하는 거울이 필요하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조건인 '복수성'의 핵심을 이룬다. 우리는 남을 통해 나를 알게 되고, 남으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공허하다. 그 남과 헤어지고 홀로 있는 순간, 나를 인정하고 알게 해준 그 남은 언제든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로부터 온 인정과 앎 역시 허망하게 사라지는 허무한 것이다.
홀로 남았을 때 사람은 비로소 '남을 넘어선 남', 남이 사라지더라도 언제든 자기와 함께하고 있는 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남을 넘어선 남'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로부터 인정 받아야 하고, 그에 비추어 자기에 대한 앎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자기 안의 복수성을 인식하게 되고 그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이해를 구하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떄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도 자기를 납득하지 못할 때가 아닌가? 그것은 인간이 바로 '자기의 복수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