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브로크스  당신은 향수nostalgia와 관련된 시간의 특징을 밝히려 시도하고 있나요?


마크 피셔  맞아요. 그런데 이건 심리학적 향수 자체가 아니라 오늘날 나타나는 향수의 형식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둘 다기도 하지만, 더 문제가 되는 건 향수의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사물들이 반복되지만 그 사실이 인식되진 않으며 혼성 모방pastiche이 점차 자연화되는 거죠. 80년대 텍스트들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혼성 모방이 점점 만연해질 거라고 말했습니다.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지적이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른 것의 초기에 혼성 모방은 분명 여전히 하나의 스타일이었고 사물들에는 여전히 인용 부호가 쳐져 있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에는 인용 부호가 사라졌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전용appropriation은 더 이상 주의를 끌지 못합니다. 그저 전제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이게 무엇의 향수일까요? 이를 고려하면 21세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21세기 문화는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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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  (...)결정적인 사실은 우리가 20세기에 기대했던 미래들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점에 기초해 관점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90년대는 훌륭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관점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2차대전 종전 후의 문화에 빠르게 퍼졌던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제가 대중 모더니즘popular modernism이라 부르는 흐름으로, 높은 기대를 낳았지만 이제는 종결되었죠. 20세기에 우리가 투사했던 건 미래들을 향한 갈망이었고, 제가 보기엔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반면] 21세기 들어 우리가 마주한 것은 동시대적인 것과 모던한 것의 혼동, 실제로는 동시대적인 것이 모던한 것을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깊이 없는 동시대적인 것만이 남았죠.

이 사실이 90년대에 이르러 실제로 분명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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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브로크스  제 생각에 새로움에 관한 이야기에서 핵심은 메인스트림에 도전한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만약 새로운 것이 순수하게 틈새 관심niche interest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무시해도 될까요? 도전을 제기하는 건 아니니까요.


마크 피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새로운 게 있는지 아직 우린 몰라. 새로운 뭔가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직 우린 모르는 거지.” 그런데 바로 이런 태도가 오류입니다. 이전에 사람들은 새로운 무언가가 있을 때 그걸 알아차렸습니다. 저런 태도가 참이더라도, 오늘날의 하이퍼-가시성 시대에 우리가 정말로 보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조금 기이할 겁니다.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새로움에 관한 모종의 대중적 경험이에요. 적어도 이런 경험이 사라져 버린 거죠. 또 잃은 건 실험적인 것, 아방가르드, 대중적인 것의 순환입니다. 대신 우리는 ‘실험적인 것’이라는 상표를 얻었죠. 메인스트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저만의 틈새 시장을 보유하고서 확고히 자리 잡은 장르들 말이죠. 그리고 조직적인 선전propaganda에도 불구하고 메인스트림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과거보다는 한층 덜 도전받죠. 왜 그럴까요? 지금은 저 같은 사람도 저만의 틈새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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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브로크스  무언가를 향한 운동의 일부였던 펑크에서 비판적 혼합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경험은 이와 매우 상이합니다. 우리는 스타일들 사이에서 길을 찾는 개인들이고 그 어떤 하나의 운동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당신도 이런 경향을 인지하시나요?


마크 피셔  말씀하신 대로라고 점점 더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사실 매우 한정돼 있죠. 표면적으론 자아를 대체할 가능성이 무한히 존재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 귀결은 무엇일까요? 사전에 마련된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죠.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집단적으로 생산하는 역량은 극단적으로 위축돼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운위되는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무의미한 선택들의 무한성을 만드는 역량이 실제로 사태를 변화시키는 역량을 대체한 거예요. 그리고 무한한 대체 가능성이라는 감각의 근원에는 무엇도 다시 생겨날 수 없다는 압도적인 감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이것이 현 순간의, 즉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핵심 변증법인데, 그 무엇도 고정돼 있지 않지만 그 무엇도 정말로 생겨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죠. 이 둘은 전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사이먼 레이놀즈가 이를 구분했는데 그에 따르면 일상생활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문화의 속도는 둔화됐습니다. 최근에 조디 딘이 매우 감동적인 글을 한 편 썼어요. 이 글은 표면적으론 조너선 리섬의 책 «반체제 정원들»Dissident Gardens 서평인데요. 거기서 딘은 이 책을 당 소속이라는 문제와 결부시킵니다. 당에 소속되면 팸플릿 배부 따위의 재미없고 고된 일이 [견딜 만해—원문]집니다. [당에 소속된다는—원문] 서사를 갖게 될 때 이 단조로운 활동들이 근본적으로 변형됩니다. 삶 전체가 근본적으로 변형되는 거죠. 자본주의는 이런 변형과 비견될 만한 그 무엇도, 우리가 긍정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그 무엇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낙담 혹은 부인된 낙담은 무언가에 실제로 속하고자 하는 갈망 혹은 갈구의 징후예요. 자본주의는 충족할 수 없을뿐더러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는 갈망이나 갈구 말이죠. 그러므로 제가 하고 있는 일은 부분적으로 저 근원적인 부정성을 슬픔을 인식하는 수단이자 슬픔의 원인으로 표면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성을 드러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우울을 분노로 전환시키게 될 겁니다.


(https://playtime.blog/2018/12/28/515/)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