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라는 단어는 ‘원리’를 뜻하는 ‘아르케’와 친화성을 갖고 있는데, 이르케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원리, 혹은 ‘시작’의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규범적이고 법적인 원리, 혹은 ‘명령’의 원리이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있었으면 문제는 간단할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사정이 복잡해지는 것은, 이 두 원리가 하나 이상이며 둘 이하라는 점이다. 시작의 원리로서의 아르케는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근원을 상징한다. 그러나 법의 원리로서의 아르케는 인위적이고 규제적인 질서로부터 시작한다 (이 두 가지를 완벽히 일치시키려는 욕망이 ‘아카이브 병’을 낳는다). 데리다는 아카이브라는 단어가 ‘아르케이온(arkheion)’, 즉 공적인 문서보관소를 말하는 단어에서 나왔음을 상기시킨다. 아카이브는 단지 문서보관소가 아니라, 명령을 내리고 문서들을 해석할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인 ”아르콩트(archontes)“의 공적 거주지이다. 아카이브가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만큼이나 생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카이브를 방법론에 국한시키지 않고 하나의 세계관으로 확장시키면서도, 데리다는 은유적 차원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아카이브’의 기능을 파헤침으로써 이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아카이브에 대한 데리다의 관심은 그의 지속적인 연구주제인 글쓰기라는 ‘기억의 보완물’에 대한 탐구와 궤를 같이 한다. 플라톤 이래 서구 형이상학의 핵심을 형성해왔던, ‘살아있는 기억’의 현전에 대한 욕망과 그 외부적 보완물로서의 글쓰기 혹은 아카이빙의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사실상 보완물로서의 글쓰기가, 그리고 그것의 근원적 폭력성이, 살아있는 경험보다 앞서며 그 가능성을 구성한다는 것을 데리다는 주장한다. 결국 보완물이 원본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토대라는 것, 근원 혹은 기원은 유령과 같은 허구적 구조 위에서만 존재 가능한 범주라는 것이다. 근대적 아카이브와 탈근대적 아카이브, 관료주의적 아카이빙과 미학적 아카이빙 사이의 선명한 구별은 흐려진다.”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목소리에 집착하는 예루살미의 태도에서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설명했던 원초적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한다. 부족의 모든 여자들을 소유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원초적 아버지를 아들들이 공모해서 살해함으로써,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가설이다. 하지만, 라캉의 해석에 따르면, 죽은 아버지는 살아있는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막고, 그에 따라 인식이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 장소로 아버지를 옮겨놓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 살해된 아버지가 가졌던 절대적 힘의 장소를 법이 대신 차지했다고 말한다. 데리다의 해석 역시 라캉과 유사하다. 라캉과의 차리아면, 데리다는 이러한 원초적 아버지의 흔적을 정신분석학 아카이브 연구자들에게서 찾음으로써 정신분석학을 해체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예루살미는 끊임없이 프로이트라는 "타자의 자리에서" 발언하고자 한다. 이 타자는 이미 죽은 아버지, 유령이다. 이 유령은, "옳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옳다는 것이 증명된, 마지막 말을 하게 되어있는, 가부장적 유령(fantome paternel)"이다.
   가장 과학적이고 공적이며 객관적인 작업 한복판에,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유령의 장소가, 토대 없는 허구가 자리 잡고 있다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한다. 이 장소는 더 이상 아카이브적이지 않은 것, 더 이상 공적이고 객관적이지 않은 것의 장소, 지식이 유예되고 유령이 등장하는 곳이다. 아니, 아카이브의 핵심부에서 발견되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삭제, 말소, 취소의 움직임 그 자체이다. 이 삭제, 말소, 취소의 움직임을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용어를 따라서 '죽음충동(la pulsion de mort)'이라고 부른다. 아카이브 병은 죽음충동의 다른 이름이다. "그 자신의 고유한 흔적을 지우는 움직임"으로서의 죽음충동은 근본적으로 반(反)아카이브적이다."

   "데리다는 이 반아카이브적 충동이 아카이브의 핵심부에서 작동함을 주장함으로써 아카이브의 객관성을 보증하는 '근원'에 대한 통상적 믿음을 전복시키고자 한다. 즉 아카이브의 근원 혹은 출처는, 살아있는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것, 즉 죽음충동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시작 혹은 근원에 대한 믿음은, 유령 같은, 토대 없는 허구에 의해서만 지탱된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글쓰기와 그것의 취소 행위 자체가 아카이브의 가능성을 구성하는 궁극적 토대임을 주장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렇게, 모든 '근원' '하나' '단일성'의 가능성은 그 단일성을 내부로부터 침식하는 타자성의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원에 대한 열망'이 곧 아카이브를 움직이는 열망이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그 기원에 가닿는 것이 불가능할 때에만 구축될 수 있다는 역설이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아카이브가 "유령적(spectrale)"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에게서 죽음충동은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충동, 혹은 '유한성'의 충동으로 정의되었지만, 데리다의 재해석에 따르면, 죽음충동은 근원으로의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충동이며, 반복을 추동하여 아카이브의 미래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무한성'의 충동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아카이브는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아카이브의 이 '미래지향적 성격'은 상투적인 행위, 즉 반복에 의해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아카이브는 보존적이면서 창설적이고, 보수적이면서 혁명적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예루살미의 집요한 질문처럼,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이 반복되기에, 미래는 개방된다. 데리다에게서 아카이브의 미래는 '글쓰기 장면의 반복' 그 자체에 의해 가능해진다. 데리다는, 아카이브가 겨냥하는 미래는 단지 반복에 의해서만 열린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상투적인 창조성의 개념에 의문부호를 던진다. 이런 시각에 의하면, 동시대 예술의 성격을 규정하는 '탈근대적 아카이브'는 근대적 아카이브의 외부가 아니라 그 핵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은밀히 작동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이 은밀한 존재를 어떻게 가시적으로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것이 개별 작가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조선령, <아카이브와 죽음충동>)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