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은 방금 약국 문을 닫고 거리로 나온 순간에 그녀가 다섯, 여섯 살 적 백화점 청소부였던 어머니가 밤마다 퇴근길에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서 자가용을 운전할 때 틀어뒀던 팝송이 떠올랐다며, 졸려 감은 눈 밖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차창 밖의 세계가 등받이에 기대 잠든 그녀의 얼굴 위로 남겨둔 리듬, 그런 불빛의 기억을 좇을수록 어릴 적에 눈을 감고서 바라보았던 도시가 방금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맨해튼이 되어 그려졌다고, 핵폭탄이 떨어지던 곳도 거기였어? 그건 아마 여기였지. 그 후로 같은 꿈을 꾼 적은 없지만 자주 떠오르긴 해. 슈만 따위 들을 때 갑자기 생각나기도 했고. 야간 당직을 끝내고 병원 퍼스를 타고서 집으로 돌아오다가도 그랬는데 그런데 배고파. 맥주 마셔. 맥주도 다 떨어졌잖아. 한참 동안이나 쓰레기통을 찾던 우리는 빈 맥주병을 우체통 위에 가지런히 세워두려다 몽땅 깨뜨렸고, 맞아 지금 가기 괜찮은 데를 알아. 언젠가 새벽에 딱 한 번 가본 추로스 가게를 찾아가는 길에 물안개가 자욱해 거리가 희미했다. 한동안은 사진을 찍으며 웃거나 인적 드문 길목으로 비밀스레 막을 두른 물안개 속에서 이지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넋 놓다가도,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 너 지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지? 이 길이 맞는데 구글 맵이 해킹당했나 봐. 내 생각엔 네 방향감각이 해킹당한 거 같은데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결국 링이 앞장서 가게를 찾아내, 우리는 은제 식탁에 마주 앉아 추로스와 커피를 주문했다. 음악 없이 다른 손님이 두 팀쯤 있었고, 초콜릿 퐁뒤에 하얀 김이 오르는 추로스를 적시며 다들 고요했다. 이런 데를 혼자만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동안 너랑 만날 일 자체가 없었잖아. 네가 연락할 수도 있었어. 너는 왜 연락 안 했지? 몰라. 추로스가 준비되자 둘 다 먹기 전에 추로스를 손에 쥐고선 손에 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맛있음에 감동했다. 선량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살아오면서 몇 번이고 그럴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결국 선량함을 증오하게 되는 건 아닌지. 응급실에서 난동을 피우다가도 이내 눈물이 맺힌 채 잠든 이들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링이 말해와, 그렇게 타인의 역사와 본성 등을 단순화시켜 이해하려는 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유리한 일일지도 몰라, 나도 알지 근데 그런 식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거야. 어느 때는 하루 종일 그들을 모조리 산 채로 해부해버리는 상상만 하니까. 커피 세 번, 추로스를 두 번 더 주문했고 안개 밀려간 창밖으로 젖은 낙엽을 털어내며 한 손엔 버거킹 봉투를 쥔 버스 기사가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거나, 고개 젖히다가 실링팬에 비친 우리를 언뜻언뜻 스치며 쉬었다. 두 번쯤 졸았는데 눈떠보면 링도 졸고 있어서 오랜만에 눈앞에서 조는 사람의 얼굴을, 조는 각도로 흔들리는 앞머리칼 사이로 기적 같은 표정과 슬쩍 보이는 치아 사이로 터질 듯 말 듯 투명하게 부푸는 침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이 도시의 골목 끝까지 터져오는 밝음에 눈길을 가느다랗게 이어냈다. (이상우, <장다름의 집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