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신동옥

 

 

눈물을 없애면 기억이 사라진다

피와 숨을 들이키며 진땀을 흘릴수록 두꺼워지는 것은

표정이다 끝났습니다 이제 그만 유모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밤새 달려 다녔고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대로였으나 걷는 모양새는 저마다 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그다음 날 온종일 일을 했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누군가 선언했다

핸드폰 속에서 옛 친구를 새 친구로 갈아 치우고 아는 사람을 가려 만나고

모르는 물건을 사 쟁이고 집을 옮기고 행간을 바꾸어 가며 병아리가 될지도 모를

아메리칸 브랙퍼스트를 곁들여 가며, 부패한 것은 플롯이었는데

싸울 자들은 알고 나면 친구였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어제까지만 해도 이유가 분명한 싸움이었는데


창 너머 길 건너로는 무언가에 짓눌린 듯 몇몇

묵묵히 서 있고 더는 나빠질 영혼도 없다는 듯 엷은 초록빛으로

따사로운 볕이 드는 광장 한편에는 생장을 접고 속생각에 사로잡힌

나무들, 말라 비틀린 이파리는 영문 모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솟구치고

달려가며 찢어지는 구름 틈으로는 변함없이

빛살이 내리긋는데


길바닥은 여전히 차고 누군가는 여전히 더 많은 땔감이 필요하다

모두가 저마다 타당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데 그다음은?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가? 모두가 아는 그대로

그다음 이야기는 너무 슬퍼서 읽을 수가 없다 기가 막혀서

읽을 방법이 없다, 어쩌면 모두가 실수한 것

이야기에 대해서라면


모두가 무지했지만 염치가 있었고

저마다 충분히 대가를 치르고 싸웠기에 즐거웠으며

이야기는 대부분 날을 세워 가며 치러졌기에 밤은 자정을 지나고서야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둠 속에 손을 뻗어 서로의 표정을 더듬으며

줄거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혼잣손으로 셈하고 셈하며

그 무성했던 소문과 노래와 냄새들 사이로 아이들은 자라났고

집을 잃은 자들처럼 계절이 돌아와도


기어이 침묵으로

거두어지는 대단원, 맨발로 서릿발을 밟으며

바란 적도 없는데 씻은 듯 나아 버린 이적 속의 병자처럼

완전히 물오른 증오와 열기로 후끈거리는 대기 속에 뿌리를 한 뼘

더 내리는 나무는 뼈가 시리다 그 광장에서

서리와 눈보라를 딛고 선 나무는 질려 간다

온통 푸르스름한 정맥으로 뒤덮인 듯


미몽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삶이라면

하루하루가 혁명이고 창세기다 그래서 그 다음은?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야기는 언제나 줄거리 바깥에서

등장인물들을 점지했다 새는 여전히 철탑 위에 앉아 울고

나무는 동상 아래로 뿌리를 뻗어 가는데 어쩌면

거기까지가 이야기의 얼개 또는 지도


역광을 쏟아붓는 길 위에서

끝없이 갈래를 치는 길 내음을 맡으며

이야기에 취해서 그 지독에 숨이 멎어서 누군가는

여전히 저만의 지옥에 꽃을 심는다, 그이의 몸뚱이에서

그이의 눈 코 입으로 촛농이 지글거리는 소리

고깃기름에 짚단이 타는 내음


꿀벌이 집을 짓고 개미가 굴을 파고

새가 둥우리를 올리듯 짓는 동시에 허물어지는 이야기

결말이 없는 흐름이 전부인 이야기 몇 줌의 흰 별을

얼음장 깔린 광장에 흩뿌리며, 정적 속에서

흐느낌은 더욱 선명한 메아리를 만들어 냈다

서리가 소금처럼 내려앉은 뒷골목으로는 여전히

길을 재촉하는 촛불들


발뒤꿈치에서 길은 한 뼘씩 내려앉고

언젠가 모든 것이 한데 흘러들었던 광장을 되살리는

무서운 깊이, 촛농을 빠져나와 구름이 되어 비를 뿌리는

습기 그 비릿한 꿈속에서 목을 놓아 불렀던 이름들은

여전히 이야기 바깥에 있고

이제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사나운 꿈을 꾸었나 봐

자장가를 멈춰 줘

싸움은 적당히 즐거웠고

대가는 이미 치렀다

다만 약간의 실수 약간의 계산 착오

실패는 없었다 주인공도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그다음 이야기는


너무 슬퍼서 울화가

치밀어서 읽을 수가 없다

읽을 방법이 없다 모두 같은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꿈이 강이 되어 흐르는 것을 보지 못한다

못할 것이다 살아 있는 한

그 꿈의 강변에는

지쳐 잠들 누군가가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고

끝을 보지 못한 채 흘러가고 흘러나오는

이야기 이야기 다시 이야기.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