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대 소리

 

 

이승훈

 

 

병드는 것도 삶이다 오해가 삶인 것처럼 용서도 삶이지만 그러나 병에만 계속 매달릴 순 없고 자, 여기서 외칩시다 겨울밤 차창에 날리는 눈발을 보면서 외칩시다 병드는 것도 삶이다 병드는 것도 삶이다 양재역을 지나 과천으로 가면서 깊은 밤 바람에 날리는 눈발을 보면서 과천까지 과천까지 가면서 인덕원을 지나면서


당신이 나를 찾아 떠났지만 당신은 또 거짓말을 한다고 속으로 나를 비웃겠지만 비웃는 것도 삶이다 사랑이 삶인 것처럼 사랑도 사랑도 이 겨울밤 눈발도 삶이지만 계속 떠나는 것도 삶이다 눈발이 그치고 바람이 분다 난 가방에서 약을 꺼낸다 약을 먹는 것도 삶이다


이런 사실은 아마 아프리카에서도 알 것이다 그동안 난 심한 무력증에 시달렸지만 무력증도 삶이다 자, 여기서 외칩시다 다시 날리는 눈발을 보면서 물론 난 돌아온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밤 여행이라고 할까? 그러나 밤 여행도 삶이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난 아직도 감추는 게 많고 그게 또 병이지만 나같은 인간에겐 병이 재산이다 오 삶이다 난 치질 때문에 고생이다 술을 많이 마시면 피가 쏟아지고 설사도 한다 술집에서 갑자기 일어난 건 치질이 도져서였다 왜냐하면 절망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좋은 방법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오 맙소사 갑자기 이 방에서 이 거리에서 내 머리 속에서 인덕원에서 춘천에서 겨울밤 서초동에서 악대 소리가 들린다 이상한 악기들이 부딪히는 소리 난 지금 환각과 현실 사이에서 이마에 열이 나면서 혀가 타면서 무력의 절정에서 이상한 소리 쾅쾅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악대 소리를 듣는 것도 삶이다 삶은 악이 아니다 




너라는 햇빛

 

 

이승훈

 

 

   나는 네 속에 사라지고 싶었다 바람 부는 세상 너라는 꽃잎 속에 활활 불타고 싶었다 비 오는 세상 너라는 햇빛 속에 너라는 제비 속에 너라는 물결 속에 파묻히고 싶었다 눈 내리는 세상 너라는 봄날 속에 너라는 안개 속에 너라는 거울 속에 잠들고 싶었다 천둥 치는 세상 너라는 감옥에 같이고 싶었다 네가 피안이었으므로 

   그러나 이제 너는 터미널 겨울저녁 여섯시 서초동에 켜지는 가로등 내가 너를 괴롭혔다 인연은 바람이다 이제 나 같은 인간은 안된다 나 같은 주정뱅이, 취생몽사, 술 나그네, 황혼 나그네 책을 읽지만 억지로 억지로 책장을 넘기지만 난 삶을 사랑한 적이 없다 오늘도 떠돌다 가리라 그래도 생은 아름다웠으므로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