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nlos ring
김복희
죽집이 공사를 시작했다. 가벽 깊숙이 한 바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 텐데 나는 아침저녁으로 죽집 앞을 지나간다. 미로 속에서 인부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 뻔히 알지만, 샅샅이 아는 건 아니다. 뜨거운 김에 얼굴이 빨개지면서 무서운 꿈이 나쁜 꿈은 아니지. 그러니까 이제 나는 꿈을 꾸겠다. 미안하지만, 이제 나는 꿈을 이야기하겠다.
마음 단단히 먹고 죽을 끓여보자. 아끼던 돌을 제일 먼저 솥에 떨어뜨린다. 나무 국자로 숨을 걷어내며 몇 밤을 끓이는 것이다. 숨죽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방심하지 말고 가슴을 치고 인공호흡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배웠다. 심장이
화르르 끓어넘치기 전에 눌러앉힌다. 젓는다. 불을 죽이고 바닥까지 깊이 팔뚝에서 어깨까지 넣어 젓는다. 오백 명은 먹일 귀한 돌을 불린다 생각하자. 온 이마가 땀에 젖어도 국자를 잡은 손이 뜨거워져도 놓지 말자. 바닥을 건드렸을 때 숨소리가 들린다면, 시체인 줄 알았는데 신음소리를 낸다면, 당신이 되살린 것이다. 울음을 터뜨린다면 정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원망 섞인 소리를 듣는대도 처음엔 기쁘겠지 몇 날을 버티다 기절해 꾸는 무서운 꿈을 뿐, 당신이 나눠주지 않는다면 당신만 아는 돌이 되겠지. 만약 그 소리가 한 번만 들렸다면, 정말로 꿈이 이루어진 게 확실할 텐데. 두 눈 딱 감아버리면 될 텐데. 어제 왔던 인부가 내일은 보이지 않고, 미로 속에서 오늘의 인부가 배식을 기다리는데 그런데 당신은 솥을 향해 자꾸만 몸을 더 기울이고 만다. 거의 솥으로 들어갈 기세다.
아름다운 베개
김복희
움직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짐승, 나의 장미 정원은 아무에게도 열려있지 않아 거기에 정말 장미가 피어 있는지 장미의 죽어가는 가시와 마른 뿌리만 흙 위에 드러나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나의 게으른 짐승을 알리고 싶지 않다 오월의 장미들이 십이월엔 어쩌고 있는지 나의 장미 정원을 가꾸어야 할 원정이 출근하지 않고 장미 정원이 나의 장미 정원에 가까워지도록 움직이는지 아닌지 있는지 없는지 나는 그것을 내버려둔다 새와 벌레와 두더지가 바닥을 파고들어와 장미 정원을 누리는지 아닌지 저희끼리 개량을 시작한 장미들만이 무섭게 피어 있는지 저희끼리 사랑하고 꿈꾸는지 보여줄 생각으로 일부러 더 그러는지 과연 누군가 길을 잃지 않는 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향기도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으면 나의 장미 정원은 장미 정원이 되겠고 이것은 장미 정원과 내가 나눈 약속이다 죽기까지 나는 그 누구에게도 장미 정원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춤이나 그림, 노래로도 묘사해서는 안 된다 나의 장미 정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보지 않고도 안다는 것으로 몸짓이나 낙서, 흥얼거림으로 묘사하지만 아마도 다 되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을 증명하는 일은 가능을 증명하기보다 어렵다 장미의 색깔이 빛의 손톱 아래 어떠한지 연인이 겨울 외출에서 내 품으로 마침내 안겨들 때 피가 돌듯 한 종류 장미만이 나의 장미 정원을 가능케 하는지 허기진 사람이 소금물이라도 들이켜듯이 미친듯이 빛을 마시고 토하는 나의 장미 정원이 확실한지,
한 발자국도 나 자신 바깥으로 나가기 어려운 날에 장미는 식량이 되기도 하는데 배를 채우기 힘들고 연인에게는 더더욱 권하기 어렵다 이 짐승은 날거나 뛰지 않는 대신 먹을 것을 가리지 않는데 특히 인간을 좋아한다 인간을 눕히고 천천히 재운다 도망친 원정이 없고 퇴직한 원정이 없고 향기로운 꿈에 그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증거다 나의 장미 정원이 나 아닌 이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장미는 끝끝내 이해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몸 위에서 죽는다
종모법
김복희
저건 더러운 음식이야. 더러운 거야, 라고 생각하고 나서도 먹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먹지 않으면, 먹지 않는 일 말고는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릇 긁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사람들이 숨어 지내는 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도를 파야 했다
어느 사이엔가 나는 또
어린 동생도
어린 동생을 낳은 어머니도 잃어버리고
벽에 귀를 대고 발소리, 말소리를 들으면서 계속 가야 했다
옛 주인에게 종모법이란 게 있다고 들었다
누가 내게 주어
고맙다 인사도 없이 받아먹은 음식의 기억 같다
먹고 보니
모르는 친척이 어디엔가 살고 있다는 기억이 난다
내 기억에
어머니의 어머니의 등을 돌리고 주무신다
동물은 절대로 깊이 잠들지 않는다
사람만이 무섭도록 잠에 취한다
게걸스럽다
완두콩 공주
김복희
'알 수 없어'는 한국어로 '칠흑 같다' '암흑 같다' '깜깜하다'로 바꿔 말할 수 있다
호수와 밤이 뒤섞여 한 발 더 내딛고
빠져들 것 같아 죽을 뻔했다! 죽었어! 죽을 것 같아! 손님들이 야단을 떨며 웃는다
CCTV로 그들이 기슭으로 올라온 것을 확인했다
'도와줘'는 겹겹이 포개놓은 담요 맨 아래에 놓여 있는, 자고 일어나서 확인했는데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완두콩 같은 걸 말한다
나는 공주처럼 일한다
너무 크게 말고 적당히 미소만 짓도록 해 그게 우아해.
회색 눈의 노르웨이인 노인이 알려준 접객 방식이 마음에 든다
'알겠어'는 담요를 전부 정리할 후 완구콩을 입안에서 살살 굴리다가 흙밭에 톡 뱉어놓고 썩었습니다, 싹이 안 나요. 라고 보고하는 걸 말한다.
점은 무슨 색일까
나는 친구에게 손등에 개미색 점을 가진 리큐어 숍 캐셔를 그려넣은 엽서를 부쳤다
선생은 검정은 색이 아니라고 시험에도 냈다
<블랙과 화이트는 색이 아니며, 그림자는 검정이 아니니 명심해라. 검정은 없는 색이다> 흰 양말도 흰색이 아니며 검정 양말도 검정색이 아니었다 윤기가 반들반들 흐르던 검정 구두는 동양인 머리에 서양인들이 채워놓는 보라색 브릿지처럼 다른 색을 더할 필요가 있었다
개미색 구두 위로 개미가 기어오르는 그리믕ㄹ 내려고 우리는 덧칠을 배워 그늘을 만든다
암흑 물질은 실은 총천연색이고 침수된 축사의 색 역시 검정은 아니다
<나는 로스코를 보면서 눈물이 안 났어. 어떻게 하면 울 수 있을까, 벽만한 캔버스 앞에서
화가의 움직이는 등만 상상했어. 등이랑 팔이 아플 것 같았어.>
친구가 한국에서 로스코 그림이 인쇄된 엽서를 보내왔다
나는 아픈 데도 없고 몰라도 되는 것이 많고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
검정색은 그다지도 왜곡되어 고통받고 있는 걸까
그건 검정색이 선택한 문제니까 검정색이 책임져야 할 것이고 그 누구도 검정색을 보호하거나 위로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누구든 보호하거나 위로하고 싶거든 해버린다
문 열고 밥 먹어라 들이닥치는 부모같이
밥 놓ㄱ ㅗ국 놓고 앉아라 먹자 먹고 자라 외국에는 미역 같은 거 없지, 아빠는 빵은 소화가 안 돼 싫더라. 검은 빵은 좋다던데 그래 된장도 오래 삭힌 건 까매지더라. 새로 태어난 강아지 중에 하나가 검은 놈이다. 네 마리였는데 하얀 건 다 남들이 달래서 줬다.
긴 여행에는 검은 옷이 편하다
빛에 물들지 않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빛이 없는 곳에서 본 것
천천히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내 몸에서 빛이 나는 줄 알았다
내가 전시된 줄 알았다
검은 그림에서 검정색을 볼 수 있을까 다른 것이 있다고 상상하지 말고
죽겠다는데 밥을 떠먹이는 싫지만 밀어낼 수 없는 손
집을 찾으려는 개미에 대한 상상 말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개미를
친구에게 보내기로 한다 공주처럼 쓸어버려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