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

 

 

조해주

 

 

 

여름이 오기 전에

 

그는 이사할 것이다

여름은 덥고

냉장고 안의 포도는 짙어지고 있으니까

 

혀는

포도를 핥으면 보라색

얼음을 핥으면 사라지는가

 

포도에서 포도알을 하나씩 떼어

꿀꺽,

 

입에 넣은 포도알 하나가

돌탑처럼 쌓여 있던 그의 어둠을 무너뜨린다 와르르,

 

빠르게 굴러간다

참 귀엽지? 작고 동그란 것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닌 집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너무 차게 먹어서는 안 된다고 그에게 당부하는 사람은 없다

그 또한

연초에 목포로 내려가지도 않는다

 

대신 주말에는 야구장

 

집이 아닌 곳에서

그는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른다

 

야구장의 조명은 강렬하지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움직이고 나서야

공은 멀리 날아간다

 

점은 까맣고

눈부시다

 

읽다 만 책과 두고 온 지붕들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일도 없다

 

여름이 오면 그는 옮겨갈 것이다

걸을 때 바닥이 울리지 않는 집으로

 

누군가의 목구멍에 걸려 있는 기분

 

포도를 먹지 않고 내버려두면무르기 시작하고껍질이 갈라진다

 

밤이 지나고 커튼을 열면전혀 다른 빛이 새어 나온다

 


 

 

도모다찌라고 말하자 친구가 도망갔다

 

 

조해주

 

 

 

오늘 밤 자고 갈 사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잠처럼 달아나는 친구들

 

의자는 하나여서

친구가 가야 친구가 오고

 

친구가 오지 않으면 식탁은 길어진다

하얗고 하얀 식탁보

배에 슬몃슬몃 닿는 날카로움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뉜 마음이

두 개의 주사위처럼 빙그르르 돌아가는 시간

 

면 요리를 먹듯이

식탁으로부터 하양을 모조리 빼앗아볼까

 

나의 등 뒤로 인기척이 계속되는 동안

 

유리창 안에는

 

친구가 앉아 있기도 하고

친구의 무릎에 친구가 앉아 있기도 하고

친구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기도 하고

바깥으로 달려나가거나 뒤따르는

 

알아, 주먹을 던지려고 했던 거지?

공이 빠져나간다

 

퍼즐을 맞추고 있는 친구에게서 퍼즐을 빼앗으려면

힘을 합쳐 퍼즐을 완성하면 된다

 

미미!라고 부르던 것들은

미미,

하고

미미해지다가

집에 아무도 없는 오후처럼 점차 잦아들고

 

예의 바른 아이에게 식탁의 반대편은 친구네 집보다도 멀다

 

식탁에 촛불을 켜자

크고 작은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