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시간, 그런데 흐르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여자 자신이었던가? 하지만 여자 자신이란 무엇인가? 여자 자신을 이루는 비순차적인 성분? 여자가 감각하는 여자의 생이란 무엇인가? 목이 잘린 보라색 엉겅퀴, 호흡, 미이라, 붉게 시든 잣나무 숲, 호흡, 종이에 번진 흐릿한 연필 자국, 호흡, 해독할 수 없는 글자들, 호흡, 시간과 원근이 사라진 기억들, 호흡, 그것은 내면의 말인가? 아, 아, 여자 자신이란 무엇인가, 공허하게 맴도는 말과 어휘들을 넘어선 그것은?(70-1)

 

 

그런데 시간은 항상 앞으로 흐르기만 하는 것일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나를 사로잡는 생각이 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시간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일어날 모든 일이, 모든 이의 과거와 미래가, 모든 이의 기억과 망각이, 영원히 반사되는 무수한 거울 속 그림이 결국 하나이듯이, 어떤 의미에서는 동시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면 그것은 시간이 고전적으로 흐르지 않으며, 오직 스스로의 존재와 의미를 증폭한다는 뜻일까. 혹시 그것이, 언젠가 책에서 읽었으나 내가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던 단어, 초월이라던가 무한대와 같은 것, 영원의 용적을 갖는 은하들이 무한대로 반복되는, 우주의 실체일까? 나는 종종 상상하곤 하는데, 우리를 있게 만드는 보편 존재란 오직 하나, 어떤 유일하고도 거대한 감정이고, 우리라는 물질적 개인은 추상적 시간과 더불어 그 감정의 원자계를 구축할 뿐이라는 생각이다.(87)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