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모시 모턴, <실재론적 마술>
"비유적으로 말해서, 인과성은 객체의 앞에 떠 있다. (...) 이를 다르게 표현하는 방식은 인과성이 반드시 미적 차원에 속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적 차원을 연구하는 것은 인과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예술을 배우는 사람들과 문학비평가들은 축배를 들어도 좋다. 실재가 하나의 구성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놀랍게도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가 정확하게 실재적이기 때문에 - 즉, 탐색하는 인간 정신을 포함하여 어떤 객체에 의해서도 접근되지 못하도록 암호화되어 있기 때문에 - 미적 차원은 놀라울 정도로 중요하다.
객체는 물러나면서 나타난다 - p∧¬p(p와 비-p). 그리고 객체들은 그들 자신이 아닌 존재들을 포함할 수 있으며, 그래서 러셀의 역설적인 (그리고 러셀이 불법으로 여긴) 사물의 집합, 그 자체로는 자신의 구성원이 아닌 것을 예시한다. 자! 모든 것이 모순에서 비롯될 수 있다면 몇몇 사람에게 이는 객체가 무엇이든지 될 수 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모순으로부터의 추론 ex contradictione quodlibet, ECQ). 비모순율LNC이 옳지 않기 때문에 모순으로부터의 추론ECQ이 옳지 앟다고 추론할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모순이 참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이든지 참일 수 있다는 것(쇄말주의)으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객체의 양진문장적 특성 - 객체는 객체 자신이자 동시에 객체 자신이 아님 - 을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객체는 원자로 만들어졌다든가, 객체는 우유성으로 장식된 실체라든가, 객체는 기계의 구성요소라든가, 또는 객체는 과정의 구체화라든가 등등, 형이상학에는 사물들의 지형을 매끄럽게 하려는 그러한 시도가 널리 퍼져 있다. 일관성을 도입하려는 바로 그 시도가 더 급격한 비일관성을 만들어 내며, 객체를 바이러스와 같은 것으로 만든다. 즉, 그것은 객체를 진압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객체를 스스로 은밀하게 향상하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p∧¬p로 논의를 시작한다면, 우리는 우주 외부에 있는 어떤 근원적 존재자, 모든 것을 작용하게 만드는 어떠한 시동자나 원인 없는 원인(신)을 특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p∧¬p에는 이미 모든 것이 스스로 작용하기 시작하기에 충분한 역학이 있다. 당신이 진정으로 무신론자가 되고자 한다면, 기계론이나 관계주의 대신에 객체지향적 관점을 채택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43-4)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나팡가티의 그림을 일정 공간을 가로질러 접근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주체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기를 기다리는 말 없는 객체가 아니며, 텅 빈 화면도 아니며, 공간 "안에" 객관적으로 현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림은 전자기파와 같은 어떤 것을 방출한다. 그 힘의 장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림은 이미 존재하는 상황을 강력하게 입증한다. 공간과 시간은 객체의 창발적 특성이다. 칸트에게 "공간은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 객체가 직관되기 위해서 사전에 주어져야 하는 어떤 것이다. 뉴턴에 의지하며 칸트는 공간이 일종의 상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공간이 객체들에 의해 방출된다.
이 사실이 상대성 이론과 현상학에서 공통적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점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상대성 이론과 현상학이 20세기 초 대략 같은 시기에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이 객체가 뒤틀리고 물결치는 중력장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처럼, 후설은 의식히 단순히 관념이 그 안에서 떠다니는 텅 빈 투명한 매개체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현상학에서 드러난 의식은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그림의 흔들리는 물 - 이 그림의 진정한 주체는 물이다 - 처럼, 그 자체로 밀도가 높고 물결치는 존재자다.
객체의 미적 형상은 객체의 인과적 특성이 거주하는 장소이다. 물리적 인과관계에 관한 이론들은 종종 단단한 물체의 둔탁한 부딪침이나 맞부딪침으로 인과성을 환원하면서 미적 현상을 감시하고자 한다. 그림자는 단순히 미적 존재자, 효과 없는 엉터리 유령이 아니다. 플라톤은 그림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림자가 인과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내 그림자가 감광 다이오드와 교차하면 야간 조명이 켜진다.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양자가 측정되었을 때, 이는 다른 양자가 그 양자와 교차하고, 그 양자를 변화시키고, 그 양자의 위치나 운동량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학, 지각, 인과성은 모두 사실상 동의어다."(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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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을 생각해 보라. 그런 다음 3분의 2를 잘라내어 두 조각으로 나누어 보자. 이제 선들 사이의 공간, 맥놀이가 생기고 두 맥놀이, 즉 선들이 생긴다. 그런 다음 그 선들에서 3분의 2를 자른다. 더 많은 맥놀이가 생긴다. 그러고 더 많은 선으로서의-맥놀이가 생긴다. 결국에는 칸토어의 먼지를 뒤집어쓰며 끝난다. 이는 초한 집합 - 여타의 무한집합보다 훨씬 더 큰(무한하게 큰) 수의 무한집합 - 을 발견한 게오르그 칸토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칸토어의 먼지는 그 안에 무한 박동이 있고 무한 비-박동이 있어서 개묘하다. 무한 맥놀이와 무한 선으로서의-맥놀이가 있다 -p∧¬p. 이러한 역설적인 사실은 칸토어에 관한 몇몇 재해석이 때때로 편집하려고 애쓰는 발견인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알랭 바디우에 의해 선호된 체르멜로-프랑켈의 이론이다. 우리는 앞에서 근본적으로 비일관적인 객체들의 세계에 처음으로 진출했을 때 이 정식을 보았다. 이 정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째서인가? (194)
(...) 맥놀이가 끼어들 수 있는 최소한 하나의 부가적 소리 및 비-소리가 언제나 있어야 한다. 수학적으로 기울어진 사람들에게 이것은 초한 집합, 즉 일반 정수 또는 유리수(정수+분수)의 무한대보다 큰 "무한대"에 관한 칸토어의 놀라운 대각선 증명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0과 1 사이의 모든 숫자를 본다고 가정해 보자. 칸토어는 당신이 가로세로로 된 수열 속에서 0과 1 사이에 있는 각각의 숫자를 읽어낼 수 있는 격자판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것을 수행할 때마다 45도로 격자를 가로지르는 대각선에 한 숫자가 나타나고, 이 숫자는 유리수 집합에 포함되지 않는다. 경이롭게도 수열에서 항상 무언가가 빠져 있다!
우리는 칸토어가 온갖 존재자, 혹은 내가 여기에서 객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칸토어는 집합과 같은 객체가 무한, 그리고 무한소적 깊이와 그림자, 당신이 그 집합의 샘플을 취하려고 할 때마다 물러나는 어두운 가장자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실수 집합은 유리수 집합을 포함하지만, 유리수 집합은 원주율과 2의 제곱근과 같은 숫자를 포함하므로 그보다 무한히 크다. 그러한 집합들 사이에는 매끄러운 연속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실수 집합은 자신의 완전한 구성원이 아닌 집합을 포함한다 - 유리수 집합은 실수 집합 안에 어색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러셀과 같은 논리학자를 격노시킨 것은 바로 이 역설이었다. 그러한 논리학자의 "해결책"은 이러한 종류의 집합을 집합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정확히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195-6)
인과관계의 마술은 미적 차원 속에서, 즉 우리의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마술이다. (...) 설명해야 하는 사태는 덮개 아래에 있는 맹목적인 기계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모든 일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객체 밑에 있는 인과적 기계를 향한 추구는 인과성이 우리의 코앞에서 일어나는 신비라는 사실에 대한 방어적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비는 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17세기 이후로 우리가 세계에 관해 만들어 온 수많은 가정을 진지하게 수정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대한 공허 속으로 점점 가라앉아 가며 점점 작아져 가는 인간의 의미라는 섬으로 철학을 규제하는 것은 이러한 가정들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슬픈 흐름과 병행하여 예술과 삶의 미적 차원은 점점 더 기계 푷면을 장식하는 상당히 보기 좋지만 기본적으로 쓸모없는 사탕가루가 뿌려지는 것으로 추락하고 있다. 나는 정확히 정반대의 것을 주장할 것이다. 기계가 인간의 환상이고 미적 차원이 바로 인과성이 피와 살이다. 효과는 언제나 미적 효과이다. 즉, 효과는 존재자가 피부, 신경 또는 뇌를 가졌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존재자에 대한 일종의 지각적 사건이다.(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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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중간, 즉 적어도 리얼리즘 이야기의 중간에 있다는 느낌에 있어서 전형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규칙적인 리듬, 주기성에의 정착이다. (...) 서사는 빈보와 지속 사이의 비율을 활용하여 이를 달성한다. 리얼리즘 소설 중간의 한가운데에서, 빈도와 지속 비율은 일종의 역전 형식을 취한다. 즉, 그들은 각각 n분의 1과 1분의 n의 형식을 취한다. 이것이 독자들, 즉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시간은 팽창되고 압축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문장으로 며칠이 흐른다. 몇 분이 몇 년처럼 흐른다. 수천 번의 반복이 단일한 구절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이 수천 번 목도된다. 독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는데,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많은 교차 리듬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시간이 유보되었다.
(...) 베르그손이 언급했듯 연속은 희극적인 것인데, 자고로 기계같이 작동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웃기다. "중간에 있음"에 대한 지배적인 인간 미학적 활용은 다양한 종류의 희극에서 발견된다.(268-9)
음악에서 유보[걸림음]suspension는 방금 기술한 서사적 효과와 유사한 효과에 대한 전문 용어이다. 단일한 음표 또는 화음, 지속음이 변화하는 선율의 아래나 위에서 유지된다. 선율은 지속음을 끊임없이 다시 맥락화한다. 정지 상태에서 운동하는 정동이 현현한다. 디스코 음악은 우리가 가능한 한 오랫동안 무도장에 머물게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이러한 유보를 사방에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지 상태에서 걷는" 형태인 춤은 그 자체로 유보의 체화이다.
현재 순간의 디스코에 관해서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있다. 음악이 춤꾼들 그 자체에서 방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한에서 시간은 동사이다 - 내가 건축물 주변을 돌며 춤추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시계는 시간한다.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시계의 시간은 감각적 효과, 하나 이상(1+n)의 객체의 현존이 요구되는 주기성의 놀이이다 - 상호사물적 체계 말이다. 시계의 시간은 객체 자체가 방출하는 시간의 창발적 효과이다. 시간함은 자동사이며 객체 그 자체 내부의 대균열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디스코장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는 춤꾼들은 우리 주위에서 들려오는 곡조에 맞춰 춤을 추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객체로부터 시간이 창발한다는 것은 그저 물리적 사실일 뿐이다.(269-70)
현재 순간의 디스코는 거대한 변환transduction의 집합이다. 레코드 바늘(자기 카트리지)은 레코드판의 기계적 진동을 전기 신호로 변환한다. 확성기는 이 전기 신호를 음파로 변환한다. 압전 효과는 기계적 압력을 전자들의 분출, 고전압 전기 에너지로 변환한다. 이러한 정보의 분출은 부탄에 의해 더욱 증폭되어 불꽃을 일으키기기에 이른다. 전자는 전선을 가로질러 흐른다. 형광등은 그 에너지를 빛으로 변환한다. 전자기파는 공간을 가로질러 전파된다. 안테나는 전자기파를 집중시키고 전기 신호로 변환한다. 변환기는 한 종류의 에너지를 다른 종류의 에너지로 변환한다.(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