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놀이'를 통해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것은 강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어떤 상황을 맞이할 때 자신이 갖고 있는 신체와 정신의 기능을 모두 동시에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며, 열심히 일을 할 때에도 항상 놀이를 즐기는 상태에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술가는 가장 어려운 문제에 부닥쳤을 때 가장 열심히 논다. 사람이 자신이 가진 모든 정신적, 육체적 기능을 동시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기쁨이 생겨나게 된다. 이런 예는 어린이들에게서 볼 수 있다. 어린이들의 모든 기능은 동시에 한 가지 일에 빠지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즐겁게 노는 상태에 있는 듯한 것이다. 예술가들은 특정한 한 가지 목적만을 추구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역할을 아주 쉽게 수행하는 경향을 보인다.
혁신은 고대의 양식을 예기치 않게 살려내는 데서 나오는 특징이 있다. 공명하는 청각적 공간이 나타나는 전자시대는 무엇보다도 신비의 세계를 불러온다. 신비로움은 전자시대를 사는 청각적 인간에게 잘 맞는 개념으로, 이에 따라 현대인들은 미신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책 <야생의 사고>에서 원시인들의 생활을 다루면서 그들은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는데, 이는 편집증의 증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것은 전자시대를 살아가는 청각적 인간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왜냐하면 청각적인 울림과 진동이 있는 환경에서는 모든 것이 관련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십여 년 동안 예술가들이 하고 있는 역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환경에 무작정 적응해버리는 것을 막는 일이다. 로봇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변해가거나 카누를 타는 사람처럼 정해진 틀에 갇혀버릴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카누를 타고 노를 젓는 사람을 보면 몸의 움직임을 아주 딱 맞게 좌우 대칭적이고 조화롭게 맞춰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몸은 전자적인 자동제어장치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노를 젓는 동작이 좋으면 좋을수록 전자제어장치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것이 재미없는 일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은 아니다. 적응과정을 통해서 환경에 딱 맞추는 자동제어장치가 되는 위험스러운 일은 인간의 감각체계를 뒤바꾸는 급진적인 이미지 작품을 만들어낸 예술가들에 의해 가로막혀 중단된다. 예술가들은 인간의 감각체계를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전체적인 환경에 무작정 적응해서 로봇이나 하인처럼 되는 것을 막아준다. 이 말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역설처럼 들리기도 한다. 랭보는 자신의 시에서 "모든 감각의 뒤틀림(un... dereglement de tous les sens.)"라는 구절을 썼다. 예술가의 역할은 인간의 모든 감각을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새로운 직감력과 능력들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마셜 매클루언, <<매클루언의 이해>, <13. 전자시대 생존방편으로서의 예술> 결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