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크 (노라 쪽으로 몸을 굽힌다.) 노라-부인께서는 그가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노라 (약간 의외라는 듯이) 유일한 어떤 사람요?

랑크 부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사람 말이지요.

노라 (무게 있게) 예, 그렇지요.

랑크 저는 제가 떠나기 전에 부인께서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더 나은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겠죠. - 그래요, 노라, 이제는 부인도 알아요. 그리고 이제는 부인께서 다른 누구보다도 저를 믿을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노라 (일어선다. 기복 없이 조용하게) 저를 가게 해 줘요.

랑크 (노라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지만 계속 앉아 있다.) 노라......

노라 (현관으로 통하는 문에 서서) 헬레네, 램프를 가지고 와요. (난로 쪽으로 간다.) 아, 랑크 박사님, 이건 정말 너무 했어요.

랑크 (일어선다.) 제가 다른 사람만큼 부인을 열렬히 사랑했다는 것이 그렇단 말입니까? 그게 너무한가요?

노라 아니요, 하지만 그 사실을 저에게 말했다는 것이 그래요. 그럴 필요는 없었어요.

랑크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이미 알고 있었나요? (하녀가 램프를 가지고 와서 책상 위에 두고 다시 나간다.) 노라, 헬메르 부인, 대답해요. 이미 알고 있었나요?


린데 부인 나에게는 의지할 곳 없는 어머니와 어린 두 남동생이 있었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 크로그스타드 씨, 나는 그 이상 당신을 기다릴 수 없었어요. 그 당시 당신에게는 별로 희망이 없었잖아요.

크로그스타드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짐나 다른 사람 때문에 나를 내칠 권리는 당신에게 없었습니다.

린데 부인 예, 그건 나도 알아요. 나도, 내가 그럴 권리가 있었는지 스스로 묻곤 했어요.

크로그스타드 (작은 목소리로) 당신을 잃었을 때 나는 발아래에서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를 봐요. 이제 나는 난파한 배 같은 남자입니다.

린데 부인 도움이 가까지 왔는지도 모르지요.

(...)

린데 부인 나는 지혜롭게 처신하는 법을 배웠어요. 인생과 고난, 심한 가난이 나에게 가르쳐 줬어요.

크로그스타드 인생이 나에게는 남의 말을 믿지 말라고 가르쳐 주더군요.

린데 부인 인생이 아주 좋은 걸 가르쳐 주었군요. 하지만 행동은 믿겠죠?

크로그스타드 무슨 말인가요?

린데 부인 방금, 당신이 난파한 배 같은 남자라고 했죠?

크로그스타드 그런 말을 할 만도 하지요.

린데 부인 나는 난파한 배 같은 여자거든요. 내가 보살펴 줄 사람도, 돌봐 줄 사람도 없지요.

크로그스타드 부인이 그렇게 선택했죠.

린데 부인 다른 것을 선택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크로그스타드 좋아요. 그런데요?

린데 부인 크로그스타드 씨, 난파한 배 같은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에게 건너온다면 말이죠.

크로그스타드 그게 무슨 말이죠?

린데 부인 배 두 척이 함께 난파하면 배 두 척이 각각 난파한 것보다는 낫죠.

크로그스타드 크리스티네!

(...)

크로그스타드 (그녀를 뜯어본다.) 그럼 이렇게 이해해야 하는 건가요? 부인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친구를 구하려고 하는 건가요? 솔직하게 말해요. 그런가요?

린데 부인 크로그스타드 씨, 이미 한 번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판 사람은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처음 읽고서는 린데 부인의 행동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입센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린데 부인은 정말 본인의 의지로 크로그스타드에게 저런 말을 하고 있는가? 가진 게 헬메르에게 보내는 편지뿐인 만신창이의 크로그스타드와의 대화에서 린데 부인은 절대 열위에 있지 않다. 그녀가 이런 고백을 하려면 본인과 크로그스타드 둘의 생각 중 하나는 맞아야 한다. 크로그스타드의 합리적 의심을 린데 부인은 한 마디로 일축해버리고 심지어 크로그스타드는 그 대답을 철석같이 믿는다. 그러나 그러나... 린데 부인이 순전히 본인의 연심만을 고백한 것이라면 이 타이밍은 너무도 이상하다. 그녀는 크로그스타드를 헬메르의 집에서 처음 보았을 때 외면하지 않았던가? 나아가, 그녀도 잘 알듯이, 크로그스타드는 악랄한 수법으로 그녀의 오랜 지기인 노라를 괴롭힌 인물이다. 이것을 뭐랄까, 본인의 사랑을 통해서 인류애를 실천하는 듯한 모양새로 덮으려고 한다? 나는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린데 부인은 자신이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를 속이고 있든 그렇지 않든, 저 장면에서 본인의 온전한 연심(구린 표현이긴 한데 별다른 표현을 모르겠다)을 고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이 부분이 불편한 이유는 사실 그 위에 적은 장면과 대비가 되어서 그렇다. 랑크 박사는 물론 헬메르와 노라 사이를 오가면서 제 역할을 해 주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사실 없으면 안 되는 캐릭터라고까지는 생각지 않는데,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저런 대사를 내뱉는다. 애초 이 극에서 두 번뿐인 고백 장면 중 하나가 극을 완전히 뒤집는 린데 부인의 고백이니, 소급적으로라도 이쪽이 함께 부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더 중요한 것은 랑크 박사의 고백이 실패하고 마치 없던 일처럼 된다는 데에 있다. 랑크 박사의 고백은 린데 부인의 고백과 전혀 성격이 다름을 반증해 주기 때문이다. 간단히 적자면 린데 부인의 고백이 그녀가 처한 상황 및 작중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면 랑크 박사의 고백은 전혀 그렇지 않으며, 그 고백은 순전히 캐릭터의 내면에만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입센을 의심하게 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인형의 집을 나오는 노라가 있고, 곁의 어둠 속에서는 또 다른 인형의 집으로 들어가는?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