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또 하나의 현상, 훨씬 더 변덕스러운 현상이 우리의 관찰을 기다리고 있다. 예술 작품이 오로지 작품의 그림자와 비교를 통해서만 파악 가능한 것이었던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평가하면서 (칸트가 직감했던 대로) 지금까지 우리는 자연을 그것의 부정적인 측면과 비교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예를 들어, 폭풍우의 완성도가 높다거나 낮다든지, 꽃 한 송이의 독창성이 뛰어나거나 떨어진다든지 그 여부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면서 질문을 던질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나 종류의 질문들을 한 폭의 그림이나 한 편의 소설 혹은 천재들의 것이라면 어떤 종류의 작품 앞에서라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던 반면, 자연에 대해 동일한 질문을 던질 수 없었던 이유는 자연이 생산해 내는 것들 속에서는 형식이라는 원칙의 이질성을 목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경험이 제시하는 현상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전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현대 예술은 실제로 미적 판단의 전통적인 메커니즘에 호소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작품들, 예술과 비예술 간의 적대 관계가 절대적인 방식으로는 적용될 수 없는 작품들을 계속해서 더 빈번하게 선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창조와 형식이라는 원칙의 이질성이 뒤이어 예술의 영역에 억지로 끼워 맞춘 비예술적인 대상의 이질성에 의해 대치되는 경우, 즉 하나의 레디메이드 앞에서 비평적 판단은 즉각적으로 스스로와의 비교를 시작하거나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 스스로의 전복된 이미지와 비교를 시작한다. 여기서 비평이 비예술로 인도해야 하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 이미 비예술이며 따라서 비평이라는 작업은 그런 식으로 아주 단순한 정체 확인을 위해 소모될 뿐이다. 현대 예술은 이러한 과정을 좀 더 극단적으로 발전시켰고 결국에는 뒤샹이 렘브란트의 그림을 다림질 판으로 사용할 것을 제시하면서 고안해낸 리시프로컬 레디메이드reciprocal ready-made 1를 현실화시켰다. 레디메이드의 자극적인 대상성은 구멍과 얼룩과 틈을 통해, 아울러 비회화적인 소재의 사용을 통해 예술 작품을 더욱더 끊임없이 비예술적인 생산품과 일치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의 그림자를 의식하면서 예술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의 부인否認을 자기 안에 즉각적으로 받아들인다. 예술은 비평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스스로 예술의 논리, 예술의 그림자의 논리, 예술에 대한 비평적 성찰, 즉 '예술'로 등장한다.
현대 예술에서 비평적 판단은 스스로의 분열을 벌거벗은 채 드러내면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공간을 제거하거나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동시에 정반대의 과정이 우리가 자연을 생각하는 방식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예술 작품을 더 이상 평가할 수 없는 반면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지나치게 어두워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강화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자연 풍경 앞에서 이를 자연스럽게 그것의 그림자와 비교한다거나 그것이 미학적인 차원에서 아름다운지 추한지 묻는 일이 벌어지고, 아울러 예술 작품을 예를 들어 하나의 광석으로부터, 혹은 시간이 흐르면서 화학 작용에 의해 썩고 축소된 나무 조각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런 식으로 오늘날에는 예술 작품의 보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연 풍경의 보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옛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예술 작품의 복원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존재하듯 머지않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복원하는 기관을 창설할 때가 오게 되겠지만, 사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생각들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 아울러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는 그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기력함이 결국은 자연환경을 이 침투로부터 정화시키려는 욕망과 함께 동일한 메달의 양면을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미적 판단력의 관점에서 절대적인 이질성으로 나타나던 것이 이제는 무언가 친밀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고, 반대로 우리에게 하나의 친숙한 현실이었던 자연의 아름다움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예술은 자연이 되고 자연은 예술이 된 셈이다."(<시보다 시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는 로트레아몽의 말>, 조르조 아감벤, 윤병언 역, 밑줄은 인용자)
-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만든 다림질 판처럼, 기본적으로 예술을 일상생활과 용해하려는 의도를 지닌 장르다. 예술 작품과 비-예술 작품이 본질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것이라면, 그래서 예술가가 일상적인 사물을 현실 밖에 위치시키면서 작품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역도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 리시프로컬 레디메이드의 입장이다. 즉, 예술 작품을 일반적인 사물의 단계로 끌어내리면서 작품을 생활용품처럼 변화와 파손에 민감한 물건으로 만드는 일이 예술 못지않게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