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좀더 대중적인 이론이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이론은 언젠가 세상을 찬송으로 뒤덮을 개척 교회의 교리로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이론을 한다는 것은 개종과 전향, 불신과 이단을 둘러싼 일종의 종교 전쟁이 된다. 이론의 운명은 승리 아니면 패배뿐이며, 만약 이론이 패배하고 죽임당했다면, 그 뒤에는 시체에 침을 뱉거나, 죽음의 원수를 갚거나, 아니면 사흘 후에 부활하는 길밖에 없다. 여기에는 심지어 물리학자를 능가하는 오만이 있다. 적어도 물리학은 어느 선을 넘으면 자신이 입증 불가능한 가설을 다루고 있음을 알고, 자신이 블록 쌓기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세계의 질서와 부합할지도 모르는 수식의 파편들을 쌓아 올리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겸양은 결국 물리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옮겨 쓸 수 없으리라는 체념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불완전한 노트와 별도로 그 책은 언제나 이 세계에 내재하리라는 믿음의 결과다.
이것이 시사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차이가 아니다. 관건은 책 속의 말과 무관하게 세계가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아니면 책 속에 어떤 말이 적히는가에 따라 세계가 달라진다고 믿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를 다루는 과학자는 우주의 거시 구조를 다루는 과학자만큼 사변적으로 여유로울 수 없다. 대체 불가능한 비가역적 세계로서 지구의 운명은 이견을 용납할 시간이 없다. 그러나 국가와 기업과 개인의 단위들로 분열된 세계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한 권의 책을 쓰는 행위가 세계를 다시 태어나게 하려는 시도라면, 책을 쓰는 것만으로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것은 세상 밖으로 퍼져나가서, 다른 책보다 더 많이 읽히고 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어야 하고, 더 많은 지지자들을 불러 모아야 하고, 그들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오래된 슬로건처럼, 그것은 싸우면서 건설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론의 위기는 그에게 맞서는 모든 적과 장애물들, 하찮은 잡담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헛된 책들과, 복음에 감화되어 책의 군사가 되는 능력을 상실한 허수아비 같은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싸우고 건설하는 법을 망각한 이론 자신의 퇴폐에 있다."
"여기서 나는 어떻게 언어의 힘으로 이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도대체 이런 세상에서 언어를 구제할 방도가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좀더 관심이 있다. 그리고 이는 내가 새로운 이론 투쟁, 또는 이론의 영토에 대한 정화의 요구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망상에 빠진 패배자들을 처벌하고 축출한 끝에 무엇이 남을지 생각해보면, 유형지에서 스스로 처형 기계의 마지막 처형자가 되는 편을 택한 장교의 얼굴이 떠오른다. 관점에 따라, 이론의 영토는 늘상 그렇게 자신의 몸에 계율을 새기는 고통의 의식을 통해 존속했는지도 모른다. 더욱 나쁘게 보면, 지금 그것은 각자의 생존 투쟁이 벌어지는 각자의 유형지로서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배우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는 아주 오래된 철학자의 말을 기억한다. 나에게 처음 그 말을 알려준 사람은 방랑하는 외국인이었다. 나는 외국어를 읽는 것처럼 한국말을 낯설게 말하던 선생들을 기억한다. 아직 불충분한 말들이 바다처럼 펼쳐지던 것을. 나에게 이론의 영토는 근본적으로 인식론적 무정부주의의 바다였다. 신성한 지도를 고쳐 그리며 렌즈를 깎아 수평선 너머를 염탐하는 해적들의 세계. 말의 탑들이 터무니없이 쌓여 올라가고 다시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그로부터 흘러내리는 말들이 강줄기를 이루고 다시 바다로 흘러든다. 나는 이 영토가 망각되거나 폐쇄되지 않기를, 오래전 누군가 내게 그 입구를 알려주었듯이 내가 누군가에게 다시 그 반쯤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문을 열어 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그것이 이론의 운명을 근심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이론이다"(<공유지에서>, <<문학과사회>> 2017년 가을호, 윤원화)
// 아름다운 글이로군. 폭설이 내린 탓에 버스는 학교 문에 이르지도 못하고 나를 내려주었고 나는 학교의 제일 안쪽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나의 건물에 가는 대신 중앙도서관이라는 곳에 와 있다. 말하자면 책들의 성지의 범박한 판본 속에. 윤원화의 글은 이론-책의 시원을 호출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분과로서의 학문이 폐기되는 지점, 즉 이론의 (정치적) 에덴에 관한 전망(회고?)이 흥미롭다. 그것은 무위나 자연(상태)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전략적 결과물 같은 것으로... 에덴의 규율이 "하지 말라"다면 이곳의 규율은 "하라"라는 점에서 반전된 데가 있다. 또 하나. 오해는 언어 이후에 발생한 것이라는 입장에 대해서다. 말하자면 우리는 동물들을 오해하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가 동물들을 이해한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부재함으로써만 단일할 수 있는 무엇일지 모르는 일이다. 바벨을 지켜보던 신은 그것을 앗아간 게 아니라 하사한 것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