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알려져 있듯, 운동으로서의 계획을 대표하는 이론은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설명에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 종교 비판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이 이론의 강력한 종교 비판은 그 자체로 이론에 대한 교리의 압도적 우위를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비판은 해당 이론 전체를 떠받치는 세계 이해의 근본 구조가 (무의식적으로든 아니든) 교리를 모방안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는 교리가 세운 약속의 수직축을 그대로 눕혀 진보의 수평축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바꿔 말해 초월을 미래로 대체했다는 점에서 예언에 필적하는 이론으로 규정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전혀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역설이다. 교리로부터 해방된 이론이 온전한 자기주장을 펼치기 위해 다름 아닌 교리의 주요 원천 중 한 가지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모방 덕분에 마르크스주의가 그토록 뛰어난 내구성과 융통성을 자랑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이론과 무한의식>, <<문학과사회>> 2017년 가을호, 조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