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지혜에게


병원에 가지 않았다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글린카 소나타 듣는다

라르게토 마 논 트로포

(이준규)



"안단테, 걸음걸이의 빠르기로 느리게. 우리가 마음 편히 사랑할 수 있을 정도의 느린 속도는 안단테이다. 모두들 달려갈 때 혼자 걸어간다는 것은 서정적이다. 수많은 서정시들이 바로 이런 느림의 미학에 호소한다. 칸트라면 이것을 미적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상상력과 지성과 이성이 서로 자유롭게 조화하고 일치를 이루며 미감적인 공통감각(common sense)을 이룰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공통 감각 혹은 상식적인 미감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숭고이다. 숭고는 상상력이 이데아를 향해 무한히 근접해가면서 발생하는 어떤 기괴한 감정이다. 그것은 공통 감각을 넘어서기 때문에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상식적 아름다운에의 호소가 아니다. 안단테도 지나서 아다지오도 지나서 느려지는 것. 가장 느린 라르고에 무한히 근접해가는 것. 그러나 결코 느림의 이데아인 라르고만큼, 또는 가라베만큼 느려질 수는 없는 것. 그런 느림의 속도는 숭고하다. 들뢰즈가 말했듯 이런 숭고는 폭력적이다. 항상 숭고한 것은 우리의 상식적인 미감을 파괴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흑백>>에서 나타나는 모순어법, 장광설, 무의미할 정도로 과도한 나열 등은 숭고할 정도로 느리게 세계를 지나가는 사람의 기괴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매우 느린 속도로 테이프를 틀 때 듣게 되는 이상스런 목소리로 시인은 노래한다. 라르게토, 그것은 적어도 라르고보다는 조금 빨라야한다는 게 아니라 시인이 그 자신의 느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느려진 것이 아니라는 각성의 어휘이다. 그리고 그 느림은 우리의 공통 감각을 일격을 가할 만큼 느려야 하지만, 마 논 트로포(그러나 지나치게 처지거나 늘어지지 않도록)이어야만 한다. 느린 자가 유지하는 팽팽한 긴장과 집중의 힘, 나는 이 시집의 도처에서 그런 느린 긴장과 집중이 주는 힘에 매혹된다. 아주 드물게 모데라토의 속도에 호소하는 진부함이 느껴지는 곳이 있지만, 뭐 그 정도야. 이건 그의 첫 시집이니까."(진은영)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