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유전적인 과정에 비해 우울증은 처음부터 설명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환경에서 출발한다. 사실 애도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하는 상실감인 반면, 우울증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정말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타당한지도 불확실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 아브라함과 프로이트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 우울증의 메커니즘은 사실상 욕망의 후퇴가 근원적인 요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애도와의 유사성을 전제하고 살펴보면, 우리는 우울증이 하나의 패러독스, 즉 애도가 대상의 사라짐보다 앞서 일어나며 그것을 예고하는 경우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현대의 정신분석이 내리고 있는 결론들은 한때 교부들의 심리학적 직관이 도달했던 결론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교부들은 잃어버리지 않은 자산으로부터의 후퇴를 '나태'로 보았고 나태의 가장 무시무시한 딸로 '절망'을 들면서 이를 실현 불가능성과 저주에 대한 앞선 두려움으로 해석했다. 나태한 인간의 후퇴는 어떤 결함에서 비롯되지 않고, 상실로부터 보호를 약속받으려는 시도, 욕망하는 대상의 부재 속에서만이라도 그것과 함께하려는 절망적인 시도 속에서 대상을 스스로 근접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욕망의 들뜬 격양 상태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울증에 빠진 욕망의 철회가 사실은 어떤 소유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점유를 가능하게 하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울증은 사랑하는 대상의 사라짐에 대한 거부반응으로서의 철회라기보다는 차라리 가질 수 없는 대상을 마치 잃어버린 대상으로 보이게 하는 상상력에 가깝다. (...) 가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애도가 우울증인 만큼, 우울증의 전략은 허구적인 것의 존재를 위해 공간을 만들고 자아가 가상현실과 관계할 수 있는 무대의 범위를 설정하고 어떤 '소유'도 경쟁할 수 없고 어떤 '상실'도 위협할 수 없는 '점유'를 시도한다."(57-59)
"우울증에 빠진 인간이 외부세계를 사랑의 대상처럼 나르시스적인 방식으로 부정할 때, 유령은 이 부정을 통해 사실적 동기를 부여받고 새롭고 근원적인 차원에 들어서기 위해 소리 없이 내면의 납골당을 빠져나간다. 더 이상 유령도 아니고 아직 기호는 되지 못한 상태에서 우울증적 내사의 허상은 유령들의 몽상적인 무대라고도 할 수 없고 자연적인 사물들의 무관심한 공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중재적이고 계시적인 세계, 스스로를 향한 나르시스적인 사랑과 외적 대상의 선택 사이에 놓인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땅'에서만, 어느 날 인간 문화의 창조물과 상징적 형상과 문학적 실천의 앙트르베스카를 통해, 무엇보다도 인간과 더 가까운 세계, 물리적인 세계보다 더 직접적으로 인간의 행복 혹은 불행을 좌우하게 될 세계와의 접촉이 가능해질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혜와 신중을 뜻한다"고 말한 우울증의 '진지한 공간locus severus'은 동시에, 프로이트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이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스스로의 유령을 즐기기" 위해 사용하는 말과 상징적인 형상의 진지한 유희lusus severus이기도 하다. 우울증이 부동의 변증적 논리 속에서 그려내는 비현실적인 세계의 위상은 하나의 문화적인 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연금술사들이 우울증을 니그레도Nigredo, 즉 무형적인 것에 형체를 부여하고 유형적인 것에서 형체를 말소시키는 연금술의 첫 단계와 동일하게 보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부정적인 것과 죽음을 소유화하면서 최대한의 비현실을 움켜쥐고 최대한의 현실을 구축하고자 하는 인간 문화의 끊이지 않는 연금술적인 노고가 시작되는 곳이 다름 아닌 이 집요하고 편집증적인 망상에 의해 펼쳐진 공간이다."(70-71, 조르조 아감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