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의 사유
서양에서는 광명은 보통 태양이 빛나는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동아시아 전통에서 광명은 하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다. 이것을 암시하는 것이 <<천자문>>의 첫 구절 "천지현황(天地玄黃)"이다. 이 구절은 <<주역>>의 곤(坤)괘에 붙은 문언전(文言傳)에서 온다. "무릇 검고 누렇다고 한 것은 하늘의 빛과 땅의 빛이 섞인 것을 가리킨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서양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새처럼 비상하는 것, 공기처럼 가벼워지는 것과 같다. 형이하학적 중력에서 벗어나길 갈망하는 서양적 사유는 언제나 가슴에 십자가를 그린다. 먼저 수평선을 그리고, 거기에는 통속적인 질서가 펼쳐진다. 그 다음 수직선을 그리고, 거기에는 초월적인 질서가 열린다. 수직선은 수평선에 대한 부정이다. 그토록 탐냈던 욕망의 대상들이 하찮은 것으로 전도되면서 추락한다. 사유는 높은 곳에서 부르는 어떤 것에 모든 것을 걸면서 시작된다. 이상적인 모든 것을 그 곳으로 옮겨놓았으므로 사유 속에서는 현재적 삶의 무게가 사라진다. 수평선은 그런 아득한 높이로 상승하는 수직선의 균형을 지키는 보조선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에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다. 수직선을 그리며 상승하는 것은 어떤 극단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사유는 어떤 도약을 통해 극단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박한 극단의 높이에서 중용의 자리로 하강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중용에 머물기 위해 상황의 한복판으로 내려앉는 것을 일러 사유라 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육중한 산처럼 수평선의 편안함 속에, 중용의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이다. 머무는 가운데 생각을 모으고 행위와 역량을 기르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가벼워지거나 비행한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두터움을 추구하는 것, 지식이든 덕성이든 쌓고 길러서 새로운 광채를 발하는 내면적 중량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광채인가?"(김상환, <현대 미학의 개념들 2>, 계간 <<모:든시>>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