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전지구화’를 둘러싼 떠들썩한 담론적 유행은 이제 어느 정도 일단락된 것처럼 보인다. 그에 따라 한때 우리 모두를 어떻게든 끌어당겼던 이 시대개념에 대한 ‘거리를 둔’ 조망과 성찰도 비로소 가능해졌다. 내가 보기에, (주어진 현실 명제로서의) 글로벌리즘과 (그에 대한 방법적 대안으로서의) 글로컬리즘이라는 개념적 구도는 그 뒤에 자리한 보다 본질적인 또 다른 2월 구도의 이형이었던 것 같다. ‘보편주의universalism’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2원 구도가 그것이다. 이른바 차이와 존중의 다원주의로서의 다문화주의가 억압적 보편주의(가령, 민족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아니라 그와 효과적으로 ‘공모’하는 방법적 짝패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지난 수년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그와 같은 비판에 따르면, 이를테면 다문화주의가 존중한다는 타자들의 정체성과 문화란 실정적 내용이 제거된 “일종의 텅 빈 지구적 위치”이거나 혹은 이미 정교하게 “교화된domesticated” 타자성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다문화주의로 대변되는 상대(주의)적 특수주의particularism의 횡행은 ‘화폐적 추상’으로 표상되는 가짜 보편성(금융자본의 전지구화와 그에 따른 추상적 동질화)과 ‘유기적으로 접합된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문화적 상대주의 혹은 공동체적 특수주의가 갖는 특징은 억압받는 부분집합들의 문화적 미덕을 활성화하려는 시도로 드러나는데, 이때 의사quasi 보편성의 논리는 이런 시도와 대립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상업적 투자와 관련된 한 공동체 그리고 그것의 영토들보다 화폐적 동질성의 새로운 형상들의 창안에 더 매력적이고 적절한 것도 없을 것이다. (...) 이 탐욕스런 투자 자본에게 여성들, 동성애자들, 장애인들, 아랍인이 – 승인과 소위 문화적 개별성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형태로 – 출현하는 것은 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잠재력인가! 그리고 술어적 특성들의 무한한 조합이란 이 얼마나 기막힌 횡재인가!(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이렇듯 이미 차이가 현실이 된 상황에서 차이의 정치학은 무력할 뿐 아니라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새로운) 보편저위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제기되었다. 온갖 세속적 ‘차이들’을 무심하게 가로지르며traverse 여하한 사회적, 상징적 정체성과 과감하게 절연unplugging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사건과 단절로서의 보편주의의 정초! 바디우와 지젝을 위시한 이 새로운 보편론자들은 말한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하다면, 차이의 시대를 거슬러, 우리 자신의 타자성을 변화시켜서라도, 동일자를 (다시) 쟁취해야만 한다고. 차이들을 폐기하는 대신 평등성을 산출하는 보편성, 정체성과 공동체를 보존하거나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무효화하고 해체하는 보편성. 하지만 “~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이런 식의 모델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될 수 있을지, 과연 그것이 엄연히 존재하는 집단적 정체성의 귀속력을 무화시킬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보편성의 정초라는 이 어려운 과제가 이른바 ‘주체(성)subjecivity’의 문제를 결코 우회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김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