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두 개의 단상을 다시 읽어봐야 소용 없는 일이다. 그것이 출판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출판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없다. 나는 내 자신을 초월하는 문제, <즉 출판 가능성의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좋은 글인가, 나쁜 글인가?>(모든 저자가 질문하는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출판할 만한가, 또는 그렇지 못한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다만 출판업자의 질문만은 아니다. 그 의혹은 자리를 이동하여, 텍스트의 질에서 그 이미지로 넘어간다. 나는 텍스트의 문제를 타자의 관점에서 제시한다. 여기서의 타자란 독자, 혹은 어떤 독자가 아니다(이 질문은 출판업자의 질문이다). 쌍수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관계에서 포착된 타자란 내 글을 읽을 누군가이다. 나는 내 일기가 <내가 쳐다보는 사람>의 시선하에, 혹은 <내가 말을 거는 사람>의 침묵하에 놓여 있다고 상상한다. 이것은 모든 텍스트의 상황이 아닐까? - 아니다. 텍스트는 익명의 것이며, 혹은 적어도 일종의 가명, 즉 저자의 가명에 의해 생산된다. 그러나 일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비록 그 <나>가 가짜 이름이라 할지라도). 일기는 텍스트가 아닌, <담론>(특정 약호에 의해 <씌어진> 말(parole))이다. 그러므로 내 자신에게 제기하는 질문, 즉 <일기를 써야 할까?> 라는 질문은, 즉시 내 머릿속에서 <당신 마음대로>라는 불친절한 대답이나, 혹은 보다 정신분석학적인 <그건 당신 문제야>라는 대답으로 이어진다.

   이제 내게는 이런 의혹의 원인을 분석하는 일만이 남아있다. 왜 나는 이미지의 관점에서 일기의 글쓰기를 의심하는 걸까? 그것은 일기의 글쓰기가 내 눈에는 어떤 잠행성의 질환철머 부정적인 - 환멸적인 - 특징들에 의해 주조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일기는 어떤 사명감(mission) - 이 말을 우스꽝스럽게 여기지 말자 - 에도 부응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은 단테에서 말라르메 · 프루스트 ·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쓴 사람들에게는 항상 일종의 사회적 · 신학적 · 신화적 · 미학적 · 도덕적인 목적을 지녀왔다. <건축물처럼 미리 구상된> 책은 세계의 질서를 재생하며, 언제나 일원론적인 철학을 연루시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일기 책(작품)에 이를 수 없으며, 그것은 말라르메의 구분을 빌리자면 앨범에 불과하다(<작품>인 것은 지드의 생애이지, 그의 일기가 아니다). 그런데 앨범이란 교체 가능할 뿐만 아니라(이 정도라면 별문제가 아니다), 무한히 삭제할 수 있는 종이들의 묶음이다. 나는 내가 쓴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구실로 한 줄 한 줄 지워 앨범을 통째로 없애 버릴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그루코 마르크스와 치코 마르크스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묶어 놓는 계약 조문을 읽어가면서 하나하나 찢어 나갔다. 그러나 세계의 비본질을, 비본질적인 것으로서의 세계를 본질적으로 표현하는 형태가 곧 일기라고 생각하면서 일기를 쓸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기의 주체가 <나>가 아닌, 세계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술된 것은 세계와 글쓰기 사이를 가로막는 일종의 자기 중심주의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봐야 견고하지 않은 세계와 대면해서 나는 견고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중심주의 없이 일기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 물음이 나로 하여금 일기 쓰기를 가로막는다(자기 중심주의로 말하자면, 이제 진저리가 난다).

   비본질적인 일기는 또한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광적인 욕망에 의해 구술되는 그런 유일하고도 기념비적인 작품에 대해 하듯이, 일기에 자신을 투여할 수는 없다. 생리적인 기능처럼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일기의 글쓰기는, 어쩌면 즐거움이나 편안함은 주겠지만 열정은 주지 못한다. 그것은 글쓰기의 자그마한 기벽으로, 그 필요성은 씌어진 것에서 읽혀진 것으로 가는 도중에 상실된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써온 것이 특별히 소중하다거나, 혹은 적어도 쓰레기로 내버릴 만큼 그렇게 가치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카프카) 변태적인 사람이 <예, 그렇지만>이라는 말에 복종하듯이, 나는 내 텍스트가 쓸데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동일한 움직임으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비본질적인 불확실한 일기는 게다가 진정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일기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주체가 진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내 말은 일기라는 형식 자체가 부동의, 선행하는 형식(바로 내적 일기라는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으며, 그 형식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일기를 쓰면서 규정상 가상(simulation)의 운명에 처해진다. 실상 그것은 이중의 가상이다. 모든 감동은 어디에선가 이미 읽은 적이 있는 감동의 모사(copie)이기 때문에, 기분의 모음집(Releve d'Humeur) 안에 있는 그 약호화된 언어로 <기분>을 진술한다는 자체가 모사(copie)를 모사하는 것이다. 비록 그 텍스트가 <독창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모사인 것이다. 하물며 그 텍스트가 진부하고 낡은 것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작가는 그의 고통, 자신이 소중히 여겨온 용(龍)들에 의해, 또는 어떤 경쾌함에 의해 텍스트에서 자신을 재치 있는 어릿광대로 설정해야 한다"(말라르메) 얼마나 역설적인 말인가! 가장 <직접적>이고도 가장 <즉흥적인> 글쓰기의 형태를 선택하면서 나는 가장 서투른 광대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광대가 되어야만 하는 <역사적> 순간들도 있지 않은가? 나는 시대에 뒤진 한 글쓰기 형태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문학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가? 문학이 사라져 가는 바로 그 순간에 찢어질 듯한 아픔을 가지고 문학을 사랑한다고?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문학을 모방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 대해 나는 어떤 열등감도 없다.)

  이 모든 것은 거의 같은 말이다. 즉 일기를 쓸 때 가장 큰 고통은 판단의 불안정성이다. 불안정성이라고? 차라리 그 냉혹한 하강곡선이라고나 할까. 카프카는 일기에 기록된 것의 가치 부재는 항상 늦게야 인지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떻게 뜨거운 순간에 씌어진 것(그래서 내가 자랑하는)을 가지고 맛있는 찬 음식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런 상실이 일기의 거북함을 야기한다. 한 번 더 말라르메를 인용하면(그러나 그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우리가 나지막하게 고백할 때는 설득력이 있고 생각에 잠긴 듯 꿈꾸는 듯 진실해 보이던 것이, 그것을 설명하기만 하면 객설이 되어 버린다." 마치 동화에서처럼 내 입에서 나오는 꽃들은 모두 저주나 마법의 효과로 두꺼비가 된다. "내가 뭔가를 말하면, 그것은 즉각적으로 그 중요성을 상실한다. 글로 기록할 때도 뭔가를 상실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때로 다른 무엇을 얻기도 한다."(카프카) 일기에 고유한 어려움은 글쓰기에 의해 분출되는 이런 2차적인 중요성이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즉 일기가 말을 회수하고, 그 말에 새로운 금속성의 저항을 부여하는지의 여부가 확실치 않다. 물론 글쓰기는 상상계의 - 강력하고도 터무니 없는 말의 흐름인 - 유출을 기적적으로 멈추게 하는 그런 낯선 활동이다(이 점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은 지금까지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별 영향력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일기는, 그것이 <아무리 잘 씌어졌다 할지라도> 글쓰기에 속하는 걸까? 그것은 애쓰고, 커지고, 딱딱해진다. 나는 텍스트만큼이나 커진 것일까? 결코 아니다! 당신은 결코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바로 거기에 그 환멸의 효과가 있다. 내가 쓸 때에는 수긍할 만하던 것이, 다시 읽은 때는 실망하게 되는.

   요컨대 이 모든 실추는 명백히 주체의 어떤 한 결함을 지적한다. 이 결함은 실존적인 것이다. 일기가 제시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비극적인 질문, 광인의 질문이 아니라 <나는 존재하는가?>(Suis-je?)라는 희극적 질문, 얼빠진 자의 질문이다. 희극 배우, 바로 그것이 일기 쓰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결코 내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만약 내가 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기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결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기의 문학적 정체가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나는 그 쉽고도 낡은 형태를 통하여, 일기가 단지 텍스트의 연옥에 불과한 양, 그 구성되지 않은, 진화되지 않은, 미숙한 형태를 체험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래도 일기는 텍스트의 본질적인 고통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그 텍스트의 진정한 편린이다. 그 고통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즉 문학이란 증거가 없다는(sans preuve). 이 말은 문학이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말하는 것이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를 증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가혹한 조건(카프카가 유희절망이라고 말한)은 바로 일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또 바로 그 지점에서 모든 것이 역전된다. 왜냐하면 텍스트 논리학의 고요한 하늘로부터 텍스트를 추방하는 이런 증명에의 무력감으로부터, 바로 그것의 본질과도 같은, 그것만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유연성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카프카 - 그의 일기는 아마도 우리가 역겨워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리라 - 는 문학의 이런 이중적 공리, 적절함덧없음에 대해 아주 놀라울 정도로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 삶에 대해 구상하고 있던 소망들을 하나씩 다 검토해 보았다. 그때 내게 가장 중요하게, 혹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인 것은 삶을 보는 한 방식을 획득하려는 욕망이었다(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글쓰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그 안에서 삶은 추락과 상승의 그 무거운 움직임을 간직할 것이며,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지극한 명철한 의식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꿈, 표류의 상태로 인지될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이상적인 일기이다. 하나의 리듬(추락과 상승 신축성)이자, 동시에 미끼(나는 내 이미지에 도달할 수 없다)인 것. 요컨대 미끼의 진실을 말하고, 가장 형식적 조작인 리듬에 의해 이 진실을 보증하는 글쓰기. 우리는 이제 일기죽도록 작업함으로써만 거의 불가능한 텍스트처럼 극단적인 피로까지 작업함으로써만 일기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이 작업의 종착역에 이르면, 이렇게 씌어진 일기는 더 이상 어떤 일기와도 닮지 않으리라."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186-191)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