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훈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동안 계속된 나의 詩作이란 결국 나의 고독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내 시의 근원은 나의 고독이었다. 그러나 한 편의 시가 완성되었을 때 그것은 언제나 근원으로서의 나의 고독과 단절되었다. 나는 다시 고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독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고독을 이기는, 변형시키는 작업이었고, 또한 은밀히 타인들과의 교통을 지향하는 작업이었다. 그러한 작업 속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그러나 자기증명의 아이러니였다. 나는 타인들과 함께 나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들 없이도 나를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비슷했다.
자기를 증명할 수 없다는 고뇌는 침묵의 언어와 웅변의 언어 사이에서 나를 헤매게 했다. 자기증명이 끝끝내 성취될 수 없음을 자각했을 때 나는 침묵의 언어를 동경했지만, 그러나 한편 나는 언어의 힘, 언어적 조작의 웅변성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율배반의 세계였다. 웅변을 거부하고 침묵의 세계로 들어갈 것인가. 나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침묵을 파괴한다는 것은 언어의 습관적 사용에 나를 맡김을 의미했다. 언어의 습관적 사용은 상투적 일상적 사고와 관련된다. 시인은 상투적 일상적 사고를 파괴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자이다. 따라서 시인은 참담한 고뇌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위하여 언어를 실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 역시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언어는 언제나 하나의 도구, 효용성을 전제로 하는 약속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침묵을 파괴하고 웅변의 세계를 지향할 때에도 자기증명이라는 나의 노력은 역시 실패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실패는 시의 본질이 어떤 보이지 않는 세계, 소위 비대상, 혹은 無에 있다는 것, 실현된 작품은 실제로 그러한 무의 일부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암시했다. 시는 언제나 그러한 과정, 절대적인 필연성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무의 세계로 나가는 하나의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언제나 실패하고 마는 과정이었다. 나는 다시 침묵과 웅변, 무와 유, 비대상과 대상 사이에서 고독해지는 것이었다.
(...) (하나의 꽃을 꽃이라고 했을 때) 현실적인 꽃은 죽거나 부재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놓쳐선 안 될 부분이 현실적 꽃의 죽음 혹은 부재가 단순한 죽음 혹은 부재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어의 다른 하나의 특성이 개입하는 자리이다. 현실적인 꽃의 죽음이나 부재는 꽃의 현실성을 다른 방식으로 알려주기도 한다. 다른 방식으로 알려준다는 것은 현실적인 꽃의 기본적 존재가 무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모든 실존의 본질이 언어와 연결될 때 하나의 무, 죽음, 비대상에 지나지 않음을 암시한다. 문학, 특히 시가 맡는 몫이 여기 있다. 무나 죽음이나 비대상은 인간의 경우 인간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언어를 매개로 생각해본 비대상의 한 논리이다."(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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