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가 혼동해서 쓰는 ‘좌파-우파’의 쌍과 ‘보수-진보’의 쌍을 저는 구분해야 한다고 봐요. 좌-우는 명백한 실체로 구분이 되는 가치입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사회주의를 지지하느냐 자유주의를 지지하느냐의 문제예요. 시장주의자냐 아니면 개입주의자냐. 평등이냐 자유냐.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찬성하느냐 아니면 복지국가를 지향하느냐.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도 중요하겠죠. 좌-우는 콘텐츠예요. 그런데 진보-보수는 그런 사회, 정치, 경제적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봐요. 진보는 저돌적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태도’예요. 보수는 변화에 어떤 절도를 주자는‘태도’고요. 실체가 아니라 태도예요. 좌파에도 진보가 있고 보수가 있을 수 있으며, 우파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좌-우의 쌍과 보수-진보의 쌍을 교차시키면, 네 가지의 카테고리가 나와요. 1) 진보 좌파 2) 보수 좌파 3) 진보 우파 4) 보수 우파. 우파 중에서 보수는 아마도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일 거예요. 박근혜 후보가 이 범주를 대표하는 것 같아요. MB는 제가 보기에는 진보 우파예요. 물론 여기에서 진보란 강력한 신자유주의적 드라이브를 걸어서 미래로 마구 나아가려는 저돌적 태도를 가리키는 거죠. 4대강 사업 같은 걸 보세요. 흥미로운 것은 정작 좌파예요. 좌파 진보는 우리가 익히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좌파라 하죠. 그럼 좌파 보수는 무엇일까요? 좌파적 가치를 견지하되, 진보라는 개념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가 아닐까요? 지키고 보존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꾸기보다는 유지하고 보호하기를 선호하는 태도죠. 예를 들어 환경운동, 이건 좌파 보수예요. 근대의 진보주의 속에서 망각된 생명이나 지구환경의 절제된 개발을 주장할 때, 우리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의 입장에 서는 겁니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문학의 종언론을 직관적으로 비판할 때, 저는 그 고집이 생산적인 보수성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저 자신도 그런 면이 있어요. 저는 좌파 보수예요. 그런 점에서 진보 좌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각도를 발견하기도 해요. 가령 프랑스 좌파들은 생태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핵발전소 말이에요. 프랑스 좌파는 과학의 진보를 믿어요. 자신들의 기술을 믿고, 그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말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중에서 핵무기, 핵전쟁, 핵발전소, 지구온난화를 심각하게 고민한 사람을 못 봤습니다. 데리다, 푸코, 들뢰즈, 레비나스…… 누구도. 혁명을, 실재를 말하지만 혁명 이후의 삶과 상징을 말하는 ‘보수성’은 드물어요. 좌파가 보수와 창조적으로 결합해야 파괴하고 비판하고 혁신하고 바꾸는 것뿐 아니라 유지하고 건설하고 지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고 봐요. 역사의 진보를 믿고 싶지만, 저는 역사가 진보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퇴보하는 것도 아니겠지요. 다만 인간의 역사에는 목적도 종착역도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안간힘을 써보는 것뿐이죠. 벤야민이 언젠가 혁명은 진보의 기관차가 아니라 그 브레이크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제가 말하는 보수주의는 이런 의미의 보수예요. 근대성이 이렇게 진척되었는데, 전근대로 돌아가자는 19세기적 보수주의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어요? 진보가 근대성을 움직여온 가장 중요한 힘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진보의 브레이크가 없기 때문에 지구적 문명이 어디론가 알 수 없는 블랙홀로 질주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 것이 혼돈스럽고, 불안해요. 도처에 위기이고, 구조조정이고, 혁신이고, 변화예요. 삶이 나아지는 느낌보다는 지켜야 할 것들이 파괴되는 느낌이 더 커요. 이 미쳐 돌아가는 세계의 공회전을 멈추고 싶은 마음이 좌파적 보수주의라는 역설을 낳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진짜 진보를 위한 보수주의의 전도랄까요? 사실 386세대에게는 보수라는 말이 구원 불가능한 용어예요. 보수는 진보의 적이죠. 하지만 우리 세대는 ‘보수’를 탈취하여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김홍중)


"(...) 저는 마흔 살을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또 소설가로 살아가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게 있는데, 그건 모순적인 존재가 아니면 참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캐릭터를 만들려면 입체적이어야만 하는데, 입체적인 캐릭터가 어떤 캐릭터냐면 그런 모순적인 존재예요. 검사라면 전혀 검사 같지 않아야 진짜 검사에 가까워진단 말이죠. 이 사람 안에서 격렬한 내적 투쟁이 쉬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는 거죠. 그렇지 않고 그저 검사 같기만 하면 그건 평면적인 인물이 되고 말아요.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그런 걸 깨닫게 되면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점점 바뀌게 됐죠. 누군가가 아주 선명한 것을 말할 때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혁명 같은 건 너무나 아름다운 말이잖아요. 그런데 오로지 혁명, 혁명만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순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그런 생각이 점점 드는 거죠. 이건 생의 감각, 생의 깨달음일까요? 오래 살아서 드는 생각인 것 같기도 하고, 제 원래 성향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내적으로 격렬하게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만이 진실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모순된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요. 지금 말씀하신 그 보수 좌파라는 건 모순이잖아요. (웃음) 그런데 지금 저에게는 여기에 진실이 있는 거죠. 급진적 좌파나 극우는 둘 다 ‘선’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짜 ‘선’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걸 경험적으로 아는 나이가 됐어요."(김연수)


"홍중씨는 양쪽의 폐를 다 팔아서 시 한 줄을 사는 비장한 교환에 주목하셨지만, 또 이 문학적 교환이란 게 정말 피식, 웃음이 나오도록 가벼운 것이거든요. 네루다도 그렇고 아폴리네르도 그렇고 항상 우연히 만나게 된 여자를 사랑하고 단 한순간 그녀의 미소를 보려고 대단한 시 한 줄을 써서 바치거든요. 일생 동안 단 한 명의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가 만나도록 운명지어진 숱한 여자 중 한 사람. 담뱃가게 아가씨나 어느 군도의 순진한 처녀, 뭐 자신이 우연히 머무르게 된 집안의 여자 가정교사를 위해서도 전 우주적 아름다움을 모아다가 한 줄의 시를 헌정하죠. 그 여인들이 트로이를 멸망시킨 헬레나의 매혹을 지닌 것도 아니건만 법석들인 거예요. 그냥 농담 같은 연애의 가벼움에도, 자신의 전 생애를 아주 긴 창처럼 관통하는 절망과 고통의 날카로움에도 팔아먹을 수 있는 어떤 것, 연수씨 말대로 정말 모순적인 상품이죠. 고작 시 한 줄에 양쪽 폐를 팔다니, 라기보다는 양쪽 폐를 팔아서 바꿀 만한 무게의 것을 또 아주 시시한 엽서의 가벼운 한 줄과도 바꾸는 그 교환의 이상스런 부등성이 문학에 있어요. 그러니까 문학은 상품이기도 하고 상품이 아니기도 한 것이죠. 무언가와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팔 수 있는 물건 같지만 상품경제에서 화폐상품이 성립하려면 일반화된 가치형태를 가능하게 하는 양화적 등가성이 존재해야 하는데 문학이 파괴하는 게 바로 이런 양화의 사유죠."(진은영)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