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파리에 가게 된 건 팔 할이 이상우 덕분(또는 탓)이다. 플라뇌르의 기원을 탐색하고 재발명하는 여정은 사실 파리에 안 가도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내가 쓴 대부분의 글이 그렇듯 나는 어딘가에 가지 않았을 때 그곳에 대해 더 잘 안다. 어떤 사람들은 사기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소설가다운 재주라고 하지만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발로 뛰는 경험이라는 관념에 너무 사로잡혀 있다. 북토크에서 이런 질문을 받기도 했다. 작가는 땅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하는데(다시 말해 현실에 기반해야 하는데) 정지돈 작가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나요?

  무척 호의적인 질문이었지만 난감했다. 난감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땅에 발을 딛고 있다! 물론 종종 누워서 글을 쓰고 그때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지만......(내가 아는 한 누워서 글을 쓰는 또다른 작가는 정영문이다. 나는 그런 사실에 착안해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글쓰기 클래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앉아 쓰기, 누워 쓰기, 서서 쓰기').

  경험은 상상력을 제한한다. 노문학자인 김수환 선생은 내게 여행이나 실제 경험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진짜로 중요하고 흥미로운 건 이상으로 상정한 1세계의 현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상한 유토피아에 실제로 작용했던 (그들이 머릿속에서 상상해낸) 저곳의 상상계이기 때문이에요." 동시대가 흥미롭지 않은 건 모든 게 개방되고 평평해져버렸기 때문이다(또는 그렇게 착각하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여행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으며 그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세상. 그리고 그걸 산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그런 면에서 지돈 씨는 실제 경험이 아닌 텍스트를 모종의 현실로 치환해서 그 격차를 극화하기 때문에 흥미롭다는 식의 이야기였는데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의도했던 바로 그것이었지만 동시에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여행을 가면 안 되는 걸까? 경험을 하면 오히려 얄팍해지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정지돈, 55-56)

 

  "(...) 나 역시 불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뒤라스의 단편영화를 본다. 아주 가끔 몇 단어를 알아듣고 궁금한 부분은 유튜브의 자동번역 기능을 빌린다. 영어로 번역된 대본 전체를 구글에서 찾ㅇ르 수도 있다. 그러나 뒤라스가 부여한 의미를 알기 전과 후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면 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의미를 알고 나면 시시해진다는 얘기가 아니다. 명확하지 않고 다소 미적지근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전이 더 좋은 이유는 단지 시간과 순서의 문제일 뿐이다.(그리고 가끔은 이것이 문제의 전부이기도 하다). 작품이나 사태를 파악할 때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그래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속박한다. 다른 쪽에서는 그런 강박은 버리고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면 된다는 생각, 그래서 아주 엉터리로 내용을 해석하거나 나이브한 이해에서 멈추지 않게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한다. 책을 끝까지 보지 않고 이야기하면 안 돼 또는 괜찮아, 영화의 장면이 어떤 작품의 오마주인지 알아야 해 또는 상관없어, 지젝을 이해하려면 라캉을 봐야 하고 들뢰즈를 이해하려면 스피노자를 봐야 되고 결국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 구약과 신약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어떤 사람은 플라톤을 원문으로 봤고 원문에는 사실...... 등등. 전자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만들기 때문에 문제적이고(모든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후자는 무성의함, 불확실한 태도, 자기변명, 반지성적인 유행을 묵인하기에 문제적이다. 당신이 만약 작품 또는 사태에 반응하고 그 순간의 맥락에서 충실하게 접근했다면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 다만 충실도를 판단하는 것이 어렵고(이것 역시 불가능에 근접한다)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 뿐이다."(125-6)

Posted by 공장장_ :